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먼 산에 뜬 달 Oct 23. 2023

파프리카를 심었더니 글쎄

뿌린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놀라지 마시라. 파프리카가 열렸다. 파프리카 씨를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굵어지더니 꽃이 피고 파프리카가 열렸다. 별스럽지도 않은걸로 제목 낚시를 한 것이 아니다. 텃밭상자에 뭘 좀 심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저 과정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과정중 어느 단계는 동티가 나 결실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간 나의 복도 상자텃밭의 작물들은 잎이 무성해지는 것까지는 부드럽게 진행되어 한두 계절쯤은 복도를 초록으로 상큼하게 장식해 주었지만 작황은 좋지 않았다. 
 
매년 심는 상추나 고추 토마토 외에 올해는 루꼴라와 손가락 당근, 파프리카 씨앗을 사서 심어봤다. 그럭저럭 가지를 뻗어올리고 잎을 내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기특한 녀석들. 특히 루꼴라는 부지런히 자라 다양한 요리에 제 한 몸 불사르며 꼬순맛을 제공하다 얼마전 장렬하게 모두 수확되었다. 너는 훌륭한 루꼴라였다
. 내 너를 기억하겠다.
 
올해는 파프리카를 심었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는 마음으로 키웠다. 초록이 내내 고마운 날들이었다. 얼마전 찬바람이 훅 불어와 파프리카 이제 어쩌나 하고 잎을 들춰보니 콩알만하게 열매가 달려 있다. 싱그러운 녹색으로 눈이 호사를 했는데 열매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막상 고 조그만 녀석을 보니 천덕꾸러기 자식이 돈 벌어 온 것마냥 기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끼요홋~! 괴상한 소리를 내며 깨방정을 떨었다.



정원가란 ""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을 가꾸는 사람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챠페크>

사실 쿨한 척 열매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간 흙의 영양 상태에 대해 소홀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개나 고양이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면 신경쓰고 배려해야 하는 일이 많듯, 식물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히 흙이 중요하다. 좋은 흙은 물을 흠뻑 적신후 꼭 짜낸 수건처럼 적당한 물기는 있으면서도 공기를 많이 함유하고 흙 자체에는 칼슘과 마그네슘등의 영양이 충분해야 한다. 흙의 이데아가 있다면 저런 모습으로 이데아들만 모여사는 곳에서 탐스러운 천도복숭아를 키워내고 있을 것이다. 
 
내 상자 텃밭의 흙은 구청에서 신청할때 상자에 같이 딸려온 원예용 상토로 몇년째 우려먹고 있다. 물을 주며 그나마 있던 영양성분이 진즉에 다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해가 돌아오면 흙의 윗부분만 살살 일구어 새로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대는 게으른 나의 농사형태에 올해 초 나는 왠일인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꽃집에 달려가 흙과 천연비료를 사와 오래된 흙은 걷어내고 새 흙으로 바꾸어주고, 달걀껍질과 과일껍데기등을 모아 건조시켜 갈아 뿌려두었다. 씨앗과 모종을 심은 후엔 한 낮에 뿌려대는 물은 끓인 물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듣고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잔 마시기 전에 상자텃밭에 물주는 것이 먼저가 되었다. 쌀뜨물을 버리지 않고 뿌려준다. 이렇게 가꾼 흙은 나에게 받은 정성을 풀떼기에게 고대로 돌려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낙수효과인 것이다. 밭을 탓하지 않았더니 파프리카는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 열매를 맺었다.
 
남편하고 아이들한테 사진을 찍어 자랑했다. 어 파프리카네~ 이건 누가 봐도 파프리카로군 영혼없이 리액션을 한다. 이것만 보아도 행복은 결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시작하고 도모하고 수행하는 자만이 온전하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흥~!


작가의 이전글 수거 ____ 할 수 있읍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