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 오면 가장 먼저 친해져야 할 원주(原住)동물 '찡쪽'
3대 2 비율의 반듯한 직사각형 원룸.
가구라고는 책상, 테이블, 옷장, 냉장고, 침대가 전부인 방에서 살고 있다.
태국 대부분의 원룸이 그렇듯 부엌은 없고 베란다가 있다.
지나치게 단조롭지만 소위 ‘미니멀 라이프’를 꾸리기에는 제격이다.
제한된 옷장 크기에 옷 쇼핑이 자제가 되고, 가지고 있는 조리기구라곤 라면 쿠커와 전자레인지가 전부라 매일 저녁 간편하면서도 영양가 있는 요리하기 챌린지를 하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청소가 얼마나 편리한지.
밋밋한 방이지만 내 한 몸 버둥거리며 지내기에는 딱이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한국어를 가르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숙소 문을 열기가 무섭게 그대로 침대 몸을 날리기 일수다.
결코 적응이 안 되는 더위 속에서 연극배우처럼 한국어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가르치다 보면 퇴근 후 한꺼번에 몰려드는 피로야 당연지사.
태국에서 산 지 1개월 정도가 지났을 즘이었나.
퇴근 후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워있는데 침대와 맞붙은 벽 쪽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생명체가 풍겨내는 미미한 기척.
어슴푸레 눈을 떠보니 내 눈앞 벽에 찡쪽이 붙어있었다.
(*찡쪽은 도마뱀붙이과에 속하는 작은 도마뱀으로 영어로는 게코(gecko)라 불린다.)
오랜 동남아 생활을 해온 터라 이미 찡쪽과의 동거가 익숙한 나는 깜짝 놀라는 대신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방이 태국다워졌네.”
찡쪽은 참 희한하다.
사람을 보면 무서워하면서도 늘 사람 사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서식한다.
찡쪽은 모기처럼 인간에게 해로운 해충이 먹이인, 사람 입장에서는 고마운 존재다.
찡쪽은 쥐나 바퀴벌레처럼 병균을 옮기지도 않고 파리처럼 성가시게 찝쩍대지도 않고, 모기처럼 물지도 않는다.
그저 사람 근처에서 살뿐 그 흔적으로 쌀알만 한 크기의 똥을 여기저기 싸 대는 똥싸개라는 정도가 인간이 싫어할 만한 이유인데, 똥이야 보이면 휴지로 쓱 닦아버리면 되니 문제 될 게 없다.
만일 동남아 숙소에서 쌀알만 한 똥을 발견했는데 그게 쥐똥인지 찡쪽 똥인지 구분이 안된다면 이 하나만 확인하면 된다.
똥 끝에 하얀 크림 토핑 같은 것이 묻어있으면 그게 찡쪽 똥이다.
이 소심한지 종족들은 사람 인기척만 들리면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놀랄 때 어찌나 소스라치게 진저리 치는지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인기척이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지난번, 태국 고3 학생들 대상으로 태국에 대해 자랑할 만한 것을 써보라고 했다.
몇몇 학생이 쓴 글. ‘태국에는 찡쪽이 살아요.’였다.
어떤 태국인들에게는 한국에는 없는 이 찡쪽이 자랑할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동남아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숙소 안에서 찡쪽을 발견하고 놀랐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처음 보는 생명체이니 놀랄 수 있겠지.
게다가 내가 잠자는 방 안에 낯선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에 잠도 설칠 수도 있겠지.
그러니 찡쪽이 싫은 사람들은 이 소심이들이 침범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남아에서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찡쪽 죽이는 방법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태국 마트에서 찡쪽 스프레이와 찡쪽 끈끈이를 판매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끈끈이에 붙어 말라죽은 찡쪽 사진을 공유하며 찡쪽 잡은 무용담을 공유하는 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발견하고는 머리가 띵해졌다.
"펜 선생님, 태국에서 찡쪽 스프레이랑 끈끈이를 판다면서요? 태국 사람들도 찡쪽을 죽이는 거예요?"
함께 일하는 동료인 한국어 태국인 교사에게 물어보았다.
" 태국 사람들은 찡쪽 잘 안 죽여요. 해롭지 않은데 왜 죽여요. 외국인들이 무서워하니까 그런 걸 파는 거지요."
소심한 찡쪽보다 더 소심한 외국인들로 인해 생명체를 없애는 화학물질 하나가 더 생겼구나. 태국의 생태계가 위협받는 건 아닌가 심히 걱정스럽다.
자기 나라에 생기는 환경오염이 싫어 동남아에 공장을 만들고 자기 나라에 생기는 쓰레기 문제 해결을 위해 동남아에 쓰레기를 수출하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사는 처지에 그 나라 생태계까지 교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은 찡쪽이 무섭지 않으니 괜찮지만 무서워서 잠 못 자겠는 우리의 입장은 알기나 하냐는 으름장이 들릴 법도 하다.
그런 이들에게 권한다.
찡쪽은 마늘, 후추, 고춧가루, 양파 냄새를 싫어한단다.
이들 중 맘에 드는 걸 골라 방 모서리 군데군데 뿌려두시라.
그리고 조금만 용기를 내서 찡쪽을 가만히 쳐다보시라.
찡쪽의 맨질한 검은깨 같은 눈이 당신의 시선에 도망가야 하나 얼음처럼 가만히 있나 결정장애를 일으키며 세밀하게 떨리는 것을 보면 조금은 연민이 생길 수도 있겠다.
게다가 치명적인 발가락의 귀여움을 발견하면 좋겠다.
우리가 사랑하던 개구리 왕눈이가 피리 불던 그 귀여운 발가락을 꼭 닮은 발가락이다.
찡쪽과의 대면이 어렵다면, 이런 방법은 어떤가.
태국에는 찡쪽을 형상화하거나 그린 그림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찡쪽은 동남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모델이다.
음식점이나 카페 간판에서, 상품이나 로고에서, 엽서나 미술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림으로 우선 찡쪽과 친해져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내 방에는 찡쪽이 산다.
새끼 찡쪽이라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내가 퇴근하고 방 안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며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몸을 좌우 웨이브 요동을 치며 쏜살같이 사라진다.
늦은 밤, 노트북을 켜고 내일 가르칠 PPT를 만들고 있다 보면 이 새끼 찡쪽은 잠시 겁이 사라졌는지 내 노트북 옆 책꽂이에 빼꼼 모습을 보이며 나와 밀당을 한다.
내친김에 이름까지 지어줬다.
꼼.
꼬마~ 하고 부르며 말 시키기가 수월하다는 단순한 이유다.
꼼이의 사진까지 찍어서 자랑하듯 태국인 한국어 교사 펜에게 보여주니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
“선생님, 어제의 그 찡쪽이 오늘의 그 찡쪽이 아닐 수 있어요.”
이런 얘기를 한국 사는 친구들에게 하면
네가 오랫동안 혼자 살더니 외로움에 미쳐가는구나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