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느 때처럼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해체해서 생각해 본다. 좋아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보편적인 좋음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에 국한된 좋아함. 오늘의 글에서 논하는 좋아함은 오직 나를 설레게 하는 것, 얼굴이 달아오르게 하고 마음이 콩닥콩닥 뛰게 만드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해보고자 한다. (적으려고 보니 꽤나 많다. 나는 아직 삶에 설레는 사람인가 보다.)
1. 글
누구에게나 평생을 기웃거리게 되는 바닥이 있다고 한다. 내게는 그것이 글일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언어화하기 어려울 만큼 엉키고 꼬인 생각과 감정을 매일 노트에 쏟아내기를 반복했다. 시간은 흘렀고 마음은 갈무리되어갔고 어느새 사람들을 만나 누군가가 읽을 것을 상정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출판에 발을 들이고 어느 순간에는 책도 내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쏟아냈다고, 내게는 남은 재능도 열정도 절망도 없으니, 이제는 글을 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점령한 지 불과 한 주만에 손이 근질거렸다. 메모장은 착실히 쌓여 올라갔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겼다. 오랜만에 글을 공유하는 자리에 나가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여전히. 그때 깨달았다. 나는 평생 펜을 놓지 못할 사람이라고. 나의 본질적인 욕망 중 하나가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글에 에둘러 나의 근원을 적어 내리면 그것을 읽는 누군가가 나를 깊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또는 위로를 건네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글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맞잡고 마음을 맞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 책
어쩌면 글보다도 책이 먼저였을지 모른다. 기억조차 어렴풋한 어린 시절, 오밤중에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기어코 책을 읽다가 안경을 쓰게 된 때부터였을 것이다. 소설을 읽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내가 감히 나아가지 못할 여정을 탐험하는 것이 좋았다. 두근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시를 읽으면 꾹꾹 눌러 담긴 글자 너머에 있는 시인의 손을 맞잡는 느낌이었다. 그와 같이 울고, 웃고, 삶과 사람과 세상을 사랑했다. 빽빽하게 고찰을 담은 인문학 책을 읽을 때에는 나의 모든 사고방식의 기반에 사소한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생각은 조금씩 정렬되어 갔다. 책은 오랜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다. 삶을 살고, 그것을 담은 글을 쓰고, 수많은 퇴고를 거치고, 글을 예쁘게 정렬하고 표지를 붙여서, 그러고도 이런저런 절차와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세상에 나온다. 아주 느리고, 아주 깊은 생각을 담았고, 가장 조심스러운 소통의 방식이다. 조곤조곤하게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래, 나는 이렇게 살았어. 이 책을 읽는 너는 어때? 라는 질문을 살포시 건넨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애틋해서, 사랑스러워서,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좋다.
3. 독립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글과 책에 매몰되어 살기를 여러 해, 나는 그 즈음에 들어서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텍스트로 치환해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만 살다가는 너무 편협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때마침 영화를 사랑하는 친구가 내 손을 잡아끌고 극장으로 갔다. 다소 난해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영화를 봤다. 이전까지 봤던 대중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사와 영상의 강렬함 정도만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영화를 대중적인 예술의 하위 분류로만 치부하고는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상만이,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람과 삶과 사랑이 있었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요즘에는 친구(손을 잡아끌어준)와 약속을 하나 했다. 영화를 보고서 하루 정도는 감상평을 쓰지 않기로. 언어 예술이 아닌 것을 보고서 바로 언어화하지는 말자고. 그대로의 마법과 아름다움을 하루쯤은 고이 간직하자고.
4. 시각 예술. 전시
뭉크의 키스. 사랑이란 한시적으로 독자성을 잃어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시각 예술은 영화보다는 조금 더 멀리 과거로 뻗어간다. 아주 강렬하고 분명한 순간이 떠오른다. 열네 살, 학교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소풍을 온 날이었다. 선생님들도 스윽 둘러보고만 가고 싶은 지 꽤 빠르게 미술관을 훑고 있었다.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노란 그림이 걸렸다. 홀린 듯이 다가갔다. 선생님이 나를 찾으러 온 미술관을 뒤질 때까지 나는 그 그림 앞에 30분을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강렬한 노랑의 단색화였다. 층층이 쌓은 색과 마티에르를 보면서, 정오의 태양을 맨눈으로 마주한다면 이만큼 벅찬 따스함이 보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눈물이 흘렀다. 슬픔도 감동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마음이 요동쳤다.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 예술은 언어화할 수 없는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다. 그것이 한 예술가의 생애를 담은 전시의 일환일 때는 더더욱.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전기를 읽거나 연표를 탐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생략은 이따금 폭력적이다. 특히 자신만의 언어가 있는 사람에게는.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회화와 조각과 영상이 자신의 언어겠지. 온 생애에 걸쳐 만들어낸 작품을 보고 있자면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상상에 빠지고 만다. 언어화할 수 없는 황홀감이다.
5. 위스키/와인/칵테일
사실은 살짝 망설였다. 술...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것을 명문화해 버리면 너무 확고하게 못을 박아버리는 것 아닌가 싶었다. 살짝은 당당하지 못하고 분명하게 건강하지 않은 취향이다. 그러나 낭만이 불편함에서 나오듯이 아름다움은 언제나 건강하지는 않다. 그런 변명을 주워 넘겨 본다.
사케의 일종인 우부스나. 샴페인 같은 상큼함이 인상적이었다.
하루키가 산토리를 좋아했고 헤밍웨이는 다이퀴리를 즐겨 마셨듯이 책과 술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뉴욕에서 맨해튼을, 파리에서 파리지앵을, 상파뉴에서 샴페인을 마셔보는 것. 혼자 니트 위스키를 홀짝이면서 책을 읽는 것. 피노누아 한 잔을 따라 놓고 밤새 글을 쓰는 것. 위스키와 와인에 입문해서 공부해 보고 테이스팅을 조금 해보기 시작하니 더욱 흥미로워졌다. 미각과 후각을 가장 예민하게 곤두세워서 느낀 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좋다. 각 술의 지역적 특징과 역사를 공부할수록 세계 각지의 역사, 문화, 사회를 특정하고 미시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기쁨을 증폭시키고 단단하게 두른 벽을 조금쯤은 허물어뜨리는 감각이 기껍다.
6. 여행
일상을 탈피해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조금 유별난 것이라고는, 이동 시간에 거의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천-유럽 직항 비행편 14시간 동안 잠에 들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이동에 피로를 느끼지 않는 편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가족끼리 한 달에 두세 번씩은 전국 각지로 여행을 갔어서 그런지, 고등학교를 전주로 가면서 두세 시간 정도의 이동은 익숙해져서 그런지, 경기도민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제부도의 노을. 윤슬과 해길.
그런 성향과 다채로운 경험을 쫓는 방향성이 합쳐져서 이제 내게 여행은 좋아함의 영역을 넘어서 당연함의 범주에 들어섰다. 너른 바다 앞에 서 있을 때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내 모든 거대한 고민과 고난이 우주먼지만큼 티끌만 하다는 걸 느낀다. 파도가 철썩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볼 때, 어쩌면 삶은 파도와 같다고. 존재가 바다라면 삶은 그냥 파도 같은 존재의 한 양상일 뿐이라고. 가끔 어떤 파도는 하얀 거품 자국을 오래 남기기도 하지만 그것도 결국 숙명처럼 없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행기를 타고 성층권에 도달할 때는 지구의 선명한 곡면을 보면서 세상은 어쩌면 생각보다 좁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얻는다. 지구 반대편에 가서야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나와 친해진다. 수많은 역사와 사람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흔적을 거닌다. 그런 기억들이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7. 아이
위의 것들이 업보다는 취미의 영역에 가깝다면,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향후의 진로, 그리고 근원적인 삶의 지향성에 조금 더 맞닿아있다. 사실 고백하자면 어릴 때는 아기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조용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교류가 되지 않는 자그마한 것들에 그다지 큰 애정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귀하고 애틋해서 마주치기지만 하면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발생학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주차 별로, 일별로 달라지는 배아와 태아의 모습을 공부하다가 문득 그 모든 과정이 경이로워졌다. 불과 한 개의 세포였던 것이 수없이 분열하고 증식해서 올챙이만 한 배아가 되고, 어느새 심장과 뇌가 생기고, 물속을 헤엄치던 태아는 폐로 첫울음을 뱉으며 아기가 된다. 그 이후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일종의 벅찬 울컥함이 차오른다. 몇 개월 전에는 세포였던 이 아이가 어느 순간 홀로 서는 개체가 되어 수많은 사람 사이의 거미줄 같은 관계 속에 진입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는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경이롭다. 아직 사회와 인간이 만들어낸 부조리에 물들지 않은 인간 본연, 의식이나 자아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의 순수, 이런 것들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내가 열렬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써보고 나서 천천히 다시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관통하는 맥락을 찾아내고 싶었다.
결국은 사람. 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알아가는 것.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경험하는 것. 한 번뿐인 삶을 제대로 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