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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Apr 19. 2022

작품상, 뻔한 영화는 받으면 안 돼?

영화를 평가할 자격이 있는 순간




‘코다’에 대한 소심한 변명



코다가 작품상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건 내가 기대했던 '파워 오브 도그'나 '벨파스트'가 아니라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반쯤은 궁금한 마음이고 반쯤은 얼마나 좋은가 보자 하는 벼르는 마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서 생각해보니 이 영화, 정말 뻔하다. 스토리도 새롭지 않고 연출도 특별할 거 없다. 조연상은 정말로 받을 만했다. 이번 조연상은 너무도 이 영화를 위한 거였다. 그런데 작품상을?

 

내가 의아함을 품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마 너무 뻔하고 상투적인 영화라는 게 가장 클 것이다. 청각장애인 가족을 둔 10대를 소재로 한 감동 드라마로부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클리셰들의 모음이다. 통상 생각하는 ‘예술적인’ 작품이라는 감상은 더더군다나 찾아볼 수 없다.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은 것이 순전히 소재 덕분이 아니냐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에, 다행히도, 마음 속에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걸 느꼈다. 작품상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뭔가?

 

뻔하고 새롭지 않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영화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는가?

 


영화를 평가할 자격이 있는 순간


다 본 영화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은 머리를 써서 방금의 영화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성의 영역이다. 크레딧이 내려가면 머릿속에는 영화 밖의 수많은 생각이 끼어들 틈이 생긴다. 그런 생각들 어딘가에서 영화를 비판할 만한 건덕지를 찾기만 하면, 우리는 세상 그렇게 혹독한 비평가가 될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영화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수록 더 많은 생각들이 들어오고, 더 많은 비판이 가능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신랄한 비판을 듣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솔직한 내 감상도 흩어지기 마련이다.


활발한 토론과 다양한 관점은 건강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런 것들 이후에 정립된 생각들이 더 견고할지 모르나, 우리 솔직해지자.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우린 그렇게까지 혹독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중에는, 배우가 온갖 감정을 쏟아내고, 사운드가 머리를 채우고, 카메라에 내 시선을 대입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솔직하지 않은 생각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어쩌면 가장 영화를 평가할 자격이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내 감상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포장도 허용되지 않는 가장 솔직한 순간.


푹신한 영화관 의자에 앉아 스크린 앞에 놓이면, 나는 영화와 독대한다. 어떤 시니컬한 비평가라도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거짓말을 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서 코다를 보는 중에 나는 어땠냐면, 엄청 울었다. 신파 때문에 억지로 운 것도 아니고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품 때문에 나온 눈물도 아니고 (‘듄’ 볼 때는 정말 그랬다.) 그냥 루비네 가족 때문에 울었다. 어차피 대학에 붙을 엔딩임을 일찍이 알고 있었는데도 루비가 버클리에 갔으면 했고, 나머지 가족들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했다. 생각해 보면 유치하거나 뻔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는데도 영화가 나를 끌고 가는 방향에 대해 저항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영화가 웃기는 부분에서 웃었고 울리는 부분에서 울었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웃긴 장면에서는 적잖게 정적이 깨졌고 후반부에서는 어딘가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작품상 수상에 대해 의아해했던 것은 분명 영화가 끝난 뒤였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분명 영화를 보는 도중에 했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누가 상영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서 내게 영화에 대한 평가를 요구했다면, 분명 나는 내 얼굴이 왜 눈물 범벅인지에 대한 변명으로 영화가 내게 전달한 감동에 대해 얘기했을 것이지 너무 뻔해서 별로라는 불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떠오른 불만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영화 도중에 느꼈던 감정도 못지 않게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코다’의 목적


나는 ‘코다’가 얼마나 대단히 작품성이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내 감상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사실 내겐 이 영화가 좋았기 때문에, 작품상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운해져서, 그런 이들로부터 소심하게나마 영화를 변호해보려는 것이다.

 

뻔하고 참신하지 않고, 영리하지 않으면 좋은 영화가 아닌가? 무언가 깊은 뜻을 가진, 관객들의 지적 능력에 기대는 영화들이 마주해야만 하는 문제는, 그게 누구에게나 통하진 않을 거라는 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애초에 그것은 감독의 목표가 아니다. 단지 그 영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예술적 경험과 통찰을 주었다 해도, 그것이 도달하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는 말이다. 분명 관객들이 머리를 감싸고 골똘히 생각하여 저마다의 결론을 내리는 영화들만의 가치가 있다. 영화의 본질이란 그런 것에 있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분명히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코다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영화이다.  청각장애인들과 CODA들의 삶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무지를 그들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깨뜨려주는 것. 아마 영화를 본 관객 중에 이것이 먹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루비네 가족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집에 가는 길에 수화 배우는 법이라도 인터넷에 한 번 검색해봤을 게 분명하다. 청각장애인 출연진들이 토크쇼 이곳저곳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이 영화가 대성공을 거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덕은 당연하게도 영화가 자기 이야기를 한 방식에 있다. 많은 관객들이 나처럼 적어도 상영관 안에서는, 영화에 의식을 맡기고 울고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금 뻔하고 유치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시에 영화가 보다 넓은 범위의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음을 뜻한다. 만약 아카데미가 그런 부분에 점수를 좀 더 주었대도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질문은 다시, 코다가 엄청나게 대단한 영화인가?

글쎄.

 

그러면 코다는 작품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영화인가?

 

영화가 어쨌든 무언가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어떤 영화가 지나치게 제 역할을 잘 했다는 이유로 그 작품성이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뻔하고 유치해서'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건 좀 박한 평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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