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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Aug 20. 2022

벨파스트, 이토록 반짝이는 거짓말

당신의 기억은 창작물이다



나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좋아한다. 족히 수십 년 된 기억을 어제의 것인 양 늘어놓으며 분노하거나 더없이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은 드물다. 그런 대화는 정말 특별하다. 높은 확률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거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가?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냐는 평생에 걸친 수수께끼에 답하고, 눈 앞에 펼쳐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의 의미와 맥락을 알아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과거를 정립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과거에서 온 사람들이고, 현재와 미래의 자신은 과거 우리의 유산이 아닌가.  그러나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과거는 그것을 떠올리는 이 시점의 우리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며, 상충하는 경험들을 거치며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래서 득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라면 자아와 삶의 의미란 기껏해야 어렴풋한 가설로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고, 가장 사소한 사건들에 의해서 쉽게 팔랑거릴 만큼 연약하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인생을 산다기보다도, 각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중인 것 같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가 바뀌면 그 위에 쌓아 올린 현재와 미래의 자기 인식이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정된 하나의 이야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원고를 엎는 변덕쟁이 작가처럼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새로이 써가는 것이다.


<벨파스트>는 그렇게 다시 쓰인 1969년의 벨파스트와 버디의 유년 시절이다. 이 영화가 주는 희망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시간도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제안하는 데서 온다. 인간의 기억과 자기 인식의 작동방식과 그 연약함이, 사실은 삶을 영화만큼이나 반짝이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데서 온다.




 


렇게 아름다웠을리 없어


이 영화는 반짝인다. 이 반짝임은 눈을 빛내며 영화를 보는 아이의 시선에서 온다.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였던 버디의 기억 속 벨파스트는 영화에 다름 없다. 동네 한복판에서 터지는 폭탄과 길목을 막아선 군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종교 분쟁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 여전히 삶은 같은 반 친구를 짝사랑하는 로맨스 영화이고, 음악만 있으면 엄마 아빠는 로저스와 아스테어이며, 일상은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있는 치티치티 뱅뱅이다. 그것이 비록 어린아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피 터지는 싸움과 분열과, 눈물나는 작별로 가득한 삶이더라도.  


이제 아름다운 영화의 껍질을 벗기고 버디의 인생을 들여다볼까. 60대의 장년이 된, 역사적인 종교분쟁 한가운데의 벨파스트에서 유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단란한 가정과 이웃들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랐지만, 모든 것이 종교분쟁으로 산산조각 났다. 아빠는 자주 보지도 못할 만큼 멀리 일하러 가지만 돈은 여전히 부족하다. 폭동이 일어나고 폭탄과 총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조부모님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현실이 싫어 엉엉 울었다. 버디의 어린 시절이 <벨파스트>만큼 반짝였을 리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벨파스트를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첫 부분부터 현재 벨파스트의 항구와 고층 빌딩을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는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마음껏 드론을 날리고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며 카메라는 도시의 번성과 발전을 최선을 다해 뽐낸다.


그러다 발견한 담벼락의 그림은 산업과 부와 첨단의 증거들 속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이다. 이만큼 발전하기 이전의, 과거의 벨파스트와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화물과 고층 건물 사이의 발랄한 벽화가 향수를 자극하자 벨파스트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후 이어지는 담벼락 너머의 흑백 장면들은 벨파스트의 과거와 버디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그러니 영화를 반짝이게 하는 것은 1969년의 실제 벨파스트가 아니라, 버디의 기억이다. 피 터지는 종교분쟁은 그럴 수 없지만, 영화를 보듯 빛나는 시선으로 세상을 봤던 어린 아이로서의 기억은 눈부실 수 있다. 폭도들이 동네에 들이닥칠 때 카메라는 버디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목전에 둔 영웅인 것처럼 주변을 둥글게 돌며 겁에 질린 얼굴을 훑고, 버디의 엄마는 버디가 들고 있던 쓰레기통 뚜껑을 방패삼아 난리통을 뚫고 멋지게 버디를 구해낸다. 가톨릭 급진주의자들이 협박해올 때의 아빠는 무섭게 번쩍이는 눈으로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언제나 단호하게 그들을 물리친다. 영화가 그리는 삶은 결코 사실적이지 않다. 그것보단 영화를 좋아하는 아이가 자기가 본 것을 머릿속에서 영화에 빗대어 처리한 모양에 가깝다.





 

기억은 창작물이다  


극심한 분쟁 속 벨파스트와 달리 버디의 유년 시절 기억으로서의 벨파스트는 반짝이게 아름다운 것처럼, 기억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단 실제로 일어난 일을 수정하고 ‘일어났을 법한’ 일들에 대한 상상을 덧붙인 창작물이다. (Schacter & Addis, 2007) 기억은 오히려 상상에 가까울 정도이다. 실제로 이 둘은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졌고, 담당하는 뇌의 부분도 비슷하다. (Jacques et al., 2018)  


인간의 기억이 사실은 창작물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기억의 의미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은 과거의 우리 삶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데는 절망스러울 만큼 무능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본래 기억의 역할은 오차 없는 기록이 담긴 회계장부가 아니다.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삶에 대한 개인적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이다. (Conway & Loveday, 2015)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인 삶과 모순으로 가득한 자기 자신을 이해해보고자, 또는 무의미해 보이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경험을 재구성하고 맥락을 만드는 과정이다.


따라서 기억은 정확할 필요가 없다. 자전적 기억 (개인사에 관한 기억)의 정확성은 ‘일치성’과 ‘일관성’의 두 가지 척도로 평가되는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일치하고 그 흐름이 설득력 있는 기억이라면 일치성과 일관성이 모두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므로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보다는 얼마나 삶에 대한 의미를 이끌어내기 쉬운지,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일치성은 낮고 일관성은 높은, 즉 ‘앞뒤는 맞지만 실제와 일치하지는 않는’ 기억인 경우가 많다. (Conway & Loveday, 2015)


예컨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가 기억 왜곡을 유발할 수 있다. 9/11 테러 당시 비행기가 타워와 충돌하는 참사를 지켜본 사람은 자신이 그 비행기 안에 있었다고 기억하기도 한다. 이 경우 그에게 이 거짓된 기억은 관중으로서 이 비극을 지켜봐야만 했던 죄책감과 그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Conway, 2004) 자기 자신을 설득하여 진실이라고 믿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논리적이었다면, 이 경우도 일관성은 높지만 일치성은 낮은 기억의 예이다.  


기억이 상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상해본 일은, 바꿔 말하면 ‘상상에 의해 경험된’ 일이다. 따라서 그 허구의 경험이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Conway & Loveday, 2015) ‘상상 팽창 (imagination inflation)은 어떤 일을 상상할수록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믿음이 점점 강해지는 현상이다. (Anderson, 1984;Foley, Johnson, & Raye, 1983) 특히 흥미로운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상상 팽창 현상인데,  자신의 어린 시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한 기억이더라도, 그 일에 대한 상상이 이루어진 후에는 자신의 유년기에 실제로 그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Garry, Manning,Loftus, & Sherman, 1996)  


인간은 기억을 통해 스스로 거짓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적이든 아니든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격동적인 종교 분쟁 속 벨파스트가 반짝이게 아름다운 <벨파스트>가 되듯.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년기 에피소드처럼, 이 영화도 스스로 ‘일치성은 낮고 일관성은 높은’ 왜곡된 기억이다. 어린이에겐 할머니 할아버지가 제일 가는 현자이듯, 버디의 어린 시절이 꼭 이런 기억으로 남아야 했던 이유도 버디의 조부모님의 입을 빌린다.  


“네가 누구이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든, 그게 진실이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모두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야.”


이 두 대사엔 인생이 끊임없이 변하리라는 가정이 있다. 첫 번째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든 그 변화 이후의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반대로 어떤 변화를 거치든 그 전의 모습도 자기 자신이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버디가 벨파스트를 떠나 이사를 가는 것처럼, 과거의 벨파스트가 눈부시게 발전한 것처럼 삶에는 변화가 가득하다. 어린 버디는 벨파스트를 떠나기가 싫다. 친구들과 조부모님들과, 자기가 아는 모든 세상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폭동과 분열이 가득한 그 세계는 흔들리고 어린이는 성장하며 필연적으로 동심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사실은 아무리 울어도 소용없다.


정체성의 확립이란 그래서 어렵다. 변화와 성장은 필연적이고, 그 전후의 나는 너무 다른데, 그 둘 모두 나 자신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간극을 메꾸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기억을 왜곡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맘대로 기억을 지어내는 존재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뻔뻔한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인간을 너무 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저 위의 전능자처럼 공평정대하고 객관적으로 자기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닐 뿐이다. 우리는 종종 유령 같은 과거에 고통받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가득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그 둘 사이의 간극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나 오히려 나를 가슴 뛰게 했던 것은, 분쟁 속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어른이 될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니는 악몽으로 남기보다도, 사방이 반짝이는 이 영화로 기억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1969년의 벨파스트가 2021년의 <벨파스트>가 될 수 있다면, 인간의 그런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축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맘대로 지어낸 허구의 기억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인간은 집단적 허언증 환자들이 아니라, 또 통제할 수 없고 가끔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그대로 살아내야 하는 수감자들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을 써내려갈 기회가 주어진 축복받은 자들이다.   






삶에 스크린을 씌우면  


<벨파스트>는 새삼 영화를 좋아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인간의 기억과 회상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촬영하여 머릿속에서 재생해 내는 거라는 생각은 흔한 인간의 자만이며, 기억이란 사실 실제 사건을 조각내어 뒤바꾸고 여러 효과를 넣어 편집한 것에 가깝다면, 영화도 인간 기억의 또다른 형태가 아닌가? 어떠한 의미를 끌어내고 해석을 덧붙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수정을 가하는 일, 그게 바로 영화다.   


영화는 버디가 커다란 변화의 문턱에 다다르면서 끝난다. 마지막 장면의 버디는 아마 새로운 시작에 대한 불안과 작별의 슬픔에서 오는 여운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벨파스트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을 잃었고 아직 피 터지는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가 분명히 했듯 벨파스트는 아름답고 번성한 항구 도시가 되었고 영화에 눈을 빛내던 케네스 브레너의 자전적 캐릭터는 훌륭한 배우이자 감독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 시점의 관객이 보는1969년 벨파스트에서의 유년시절은 맘 편히 아름다울 수 있다.  


인간 기억이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만큼 희망적인 인생에 대한 가설은 없을 거다. 그건 인생이 설령 당신의 맘에 들지 않는대도 좀 더 기다릴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먼 훗날 푹신한 극장 의자에 앉아 흰 스크린 위에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면, <벨파스트>만큼 반짝이는 영화를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게 얼마나 많은 헤어짐과 싸움과, 내키지 않는 변화들로 가득 찬 삶이었든.  


역사적인 종교분쟁 한가운데의 벨파스트 속 버디의 어린 시절이 할리우드의 뮤지컬 스타들이 춤을 추던 반짝반짝한 70년대의 흑백영화가 된 이 영화가, 당신과 당신의 삶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의 기억 속 삶은 어떻게 반짝이는 영화가 될 것 같으냐고.                 







참고자료:
 

Conway, M. A., & Loveday, C. Remembering, imagining, false memories & personal meanings. Consciousness and Cognition (2015), http://dx.doi.org/10.1016/j.concog.2014.12.002 


Martin A. Conway, Memory and the self, Journal of Memory and Language, Volume 53, Issue 4, 2005, Pages 594-628)

ISSN 0749-596X,

https://doi.org/10.1016/j.jml.2005.08.005.


Anderson, R. E. (1984). Did I do it or did I only imagine doing it?Journal of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113,594–613. DOI:10.1037/0096-3445.113.4.594.


Foley, M. A., Johnson, M. K., & Raye, C. L. (1983). Age-related changes inconfusion between memories for thoughts and memories for speech.Child  Development,54,51–60.  DOI:10.1111/j.1467-8624.1983.tb00332.x.

 

St Jacques PL, Carpenter AC, Szpunar KK, Schacter DL. Remembering and imagining alternative versions of the personal past. Neuropsychologia. 2018 Feb;110:170-179. doi: 10.1016/j.neuropsychologia.2017.06.015. Epub 2017 Jun 17. PMID: 28633886; PMCID: PMC5733718.


Schacter. D. L. (1995). Memory distortion: History and current status. In D. L. Schacter. J. T. Coyle. G. D. Fischbach. M. Mesulam. & L. E. Sullivan (Eds.), Memory distortion (pp. 1-43).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Garry, M., Manning, C. G., Loftus, E. F., & Sherman, S. J. (1996). Imag-ination inflation: Imagining a childhood event inflates confidence that itoccurred.Psychonomic Bulletin & Review,3, 208–214. DOI:10.3758/bf0321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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