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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정희리
May 23. 2023
비포장 도로가 내 인생처럼 느껴질 때
서호주 카리지니 에코 리트리트
"비포장 도로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절대! 가서 사고 나면 우린 몰라. 니들이 다 알아서 해야 돼. 오케이?"
캠핑카를 빌릴 때 직원이 강조했던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직원의 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서호주를 달리면서 타이어가 비포장 도로에 닿지 않게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길게 뻗어있는 일반 도로는 나름 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딱 거기까지.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서 들려야 하는 휴게소(?)는 비포장 도로가 많았다.
말이 좋아 휴게소지, 그냥 허허벌판에 푸세식 화장실 두어 칸이 전부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하루 7~8시간 운전은 기본이었기에 그런 휴게소도 그저 감지덕지할 따름이지만 비.포.장.
잠시 허리를 펴기 위해 휴게소에 들어갈 때면 우린 속도를 줄이며 엉금엉금 기어가야만 했다.
행여라도 타이어에 펑크라도 나는 날엔 끝장이라는 마음으로.
그 드넓은 타국땅에서 우릴 도와줄 이는 없다.
렌터카 회사도 버린 우리를 누가 도와주리오. (타이어 펑크 났다고 연락했지만 멀어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받았음)
보험회사에 전화만 하면 바로 출동하는 대한민국 만쉐이!
그렇게 우리 부부는 비포장 도로를 피하기 위해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두 시간 이상 뺑뺑 돌아야 했던 적도 있다.
전망 좋은
룩아웃들도 그냥 지나쳐야 했다.
그런데, 왜, 어찌하여 타이어에
펑크가
났느냐
말
이다
!
<톰 플라이스 캠핑장에서 타이어 교체를 하고 있는 옆지기>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게 정말 천만다행이지만 뭔가 억울했다.
운 좋게 캠핑장 직원(이탈리아 청년 파브리치오) 덕분에 스페어타이어로 교체를 할 수 있었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다음 행선지가 카리지니 국립공원에 있는 에코 리트리트인데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3킬로미터
의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 만 했다.
스페어타이어는 필수다.
우리는 물어물어 타이어 파는 곳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보니 토요일은 12시까지만 일한다고 적혀 있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 근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호주 대부분의 상점은 아침 일찍 열고 저녁 일찍 문을 닫는 경향이 있다. (대략 am.7 ~ pm.4)
하지만 아직 퇴근 시간이 안 됐다고!!!
마음이 조급해진 우린 또 물어물어 주변 타이어 가게로 갔다.
다행히 그곳엔 직원이 있었으나 우리 차에 맞는 타이어가 없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우리의 고민은 시작됐다.
다시 톰 플라이스 캠핑장으로 가서 토, 일 보내고 월요일 아침 일찍 타이어 가게로 가느냐,
아님 원래 예정지인 카리지니로 가느냐.
스페어타이어 없이 비포장 도로가 가능해?
비포장 도로가 아닌 곳에서 터진 타이어가 비포장 도로에서 버텨 줄까?
새로 간 스페어타이어를 보니 더 불신이 강해진다.
몇 년을 매달려 있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더럽기 그지없는, 말 그대로 스페어타이어 노릇만 해줄 것 같은 그 타이어를 믿어도 될까?
에코 리트리트를 포기하면 2박 숙소 값이 날아간다.
톰 플라이스로 다시 돌아가면 날아간 숙소 값에 2박 숙소 값이 더 추가된다.
돈을 떠나 카리지니 캠핑장에서 은하수 찍을 생각에 들떠 있던 옆지기의 모습이 떠올라 안 갈 수가 없었다.
계속 망설이고 있는 옆지기에게 한 마디 했다.
"가자. 까짓 거
3킬
로
를 못 가겠어? 시속 10으로 가면 돼."
살면서 서호주를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이번 여행에서 브룸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타협점을 찾은 게 카리지니인데 그것마저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가 많이 남을 것 같았다. 못 먹어도 고!
펑크 나면 도와줄 천사가 또 나타나겠지.
그렇게 우리는 비포장 도로와 마주했고, 속도를 최대한 줄이며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시속 10으로 기어가는데도 비포장 도로의 울퉁불퉁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기에는 그다지 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막상 바퀴가 닿으니 차 안의 살림살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10으로 기어가는데도 잘못될까 봐 불안 불안했다.
3킬로
미터가 이렇게 멀
게 느껴질 줄이야...
문득 비포장 도로가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번도 고속도로였던 적이 없었던 내 인생.
늘 남들보다 느리고 울퉁불퉁 굴곡이 많았던 내 인생.
지나간 과거형이 아닌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내 인생의 고속도로는 언제 올까?
오기나 할까?
안 오면 어쩌지?
뭘 어째? 그냥 사는 거지 뭐.
천천히 가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잖아.
빨리 가면 뭐 하겠어?
숨만 차지.
놀멍 쉴 멍 천천히 가련다, 나는.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폴폴 먼지 날리며 우리 앞을 쌩하니 지나갔던 차도 거기 있었다.
우린 그렇게 다 만나게 되어 있다니까.
힘들게 도착한 카리지니 에코 리트리트는 할 말이 많아서 나중에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묶었던 캠핑장 중 가장 좋았고, 가장 실망스럽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곳.
도착하자마자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캠핑장은 보통 파워 사이트와 언파워 사이트로 구분이 되는데,
이곳은 언파워 사이트로 개인 전기와 수도를 사용할 수가 없다.
서서히 냉기가 빠져가는
냉장고에 있던 고기를 탈탈 털어 저녁을 차렸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호주산 소고기와 양고기.
후딱 밥을 먹자마자 옆지기가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은하수 사진의 배경은 거대한 개미집과 나무들.
만일 모험(?)을 포기하고 톰 플라이스로 다시 돌아갔다면 건지지 못했을 귀한 사진이다.
언파워 사이트는 전기를 사용할 수 없어 불편하지만, 대신 밤하늘의 별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언제 또 이런 밤하늘을 볼 수 있을지.
벌써부터 호주
밤하늘의 별들이 그립다.
photo by 이강민 - 출처 : https://big-crunch.tistory.com/12350127
그리고 다음날...
타이어 때문에 사실상 포기했던 카리지니의 협곡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인생이란 정말 앞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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