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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사람

by 린ㅡ


초콜릿사람. 나는 초콜릿인간이었다. 당당하게 이 문장을 과거형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렇지 못한 탓이다.


20년 가까이 알람 소리에 눈을 감은 채 걸어 나와 가장 먼저 냉동실 문을 열었고, 손바닥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의 초콜릿 하나를 의식 없이 꺼냈다. 꽁꽁 언 그것을 쪼개고 쪼개어 입안 가득 욱여넣으면, 날 선 차가움과 달콤함의 기세에 놀라 깨어날 수 있었다.


이토록 기기괴괴한 방식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은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날이라면 같은 방식에 초콜릿 개수만 더하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것에서만은 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들이는 순간 녹 사라져 버리는 탓에 구태 씹을 필요가 없었으므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고. 어쩌면 눈을 뜨지 못한 내게도 들키지 못한 채 무한하게 관대해질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무음과 무취, 무채의 초콜릿. 그것은 과연 가맣고도 고요한 아침과 퍽 어울렸다. 죽어가는 것에 배터리를 충전하듯 달콤함으로 달래 꾸역꾸역 에너지를 욱여넣는 일은 내가 하루를 달래는 방식이었고, 빠뜨릴 수 없는 매일의 첫 번째 일과였다.




마음을 잃어버리고 난 뒤 내게 남은 마지막 음식이었다. 기꺼이 먹고 싶은 유일한 것. 누군가는 그것이 건강을 해치는 못된 음식이라고 했지만, 내겐 그렇지 못했다. 하루를 맞이하게 해주는 귀한 것, 생을 마주하게 해주는 마법의 것이었다.


어쩌다 나의 조각이 부서진다면 진득하게 눌러앉은 슬픔이 초코시럽이 되어 흘러나올 것 같았고, 언젠가 죽은 나를 태우면 꾸덕꾸덕하게 들러붙은 우울이 초콜릿 진액이 되느라 굴뚝 위로 단내가 자욱할 거라고, 그렇게 달콤할 마지막을 상상했었다. 마지막엔 그랬으면 했다. 그래서였을까, 악착같이 먹어댔다.



그것마저 잃어버렸다. 버킷리스트를 지워가듯 먹고 싶은 것의 마지막 행이 사라졌고, 그것을 지운 지 한 달이 되었을까. 감은 눈으로 살금살금 걸어 나와 은박을 슬그머니 벗겨 우적우적 구겨먹던 시절은 지나갔다. 울며불며 삭이고 살아내던 시절조차 얼마나 편했던 건지, 이제는 그 맛마저, 소소했던 하루의 오픈식마저 잊어버렸다. 그 달콤하고 고약했던 낙을 잃어버렸다.


어렵고 복잡했던 나날들이 지나는 동안 속이 좋지 않았고, 잘 삼켜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아침의 달콤함마저 잊혔다. 먹는 일에 흥미를 완전히 잃었지만, 별 것 아니다. 먹고 싶은 마음을 상실했을 뿐, 여전히 배가 고프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씹어 넘기며 욕망에 쉽게 굴복한다. 단지 이제 달달한 마지막을 떠올릴 수 없다 것, 그것이 조금 아쉬울 뿐.




허기를 최대한 마주하지 않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적은 비용으로 오래도록 허기가 들지 않는 일을 연구한다. 그렇기에 사직 후 3년이 넘도록 매일 두 끼를 묶어 기꺼이 라면 하나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기괴한 연구의 포인트는 건강이나 맛이 아니라 허기와 비용이었다.


그런 내게 귀한 이들이 약속을 청해 오면 과연 근사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위해 베풀지 못한 마음을 포개 소중한 이에게 덧대어보지만, 소복해진 마음엔 설익은 라면이나 삶은 달걀 정도만 스쳤다. 하여 내게 무엇을 먹으러 가자고 청해 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행스러웠다.



내게 빈 손으로 나오라 청했다. 지금, 함께, 먹어야 할 것이 있다고 덧붙였다. 바삭하게 구워진 이파리들은 간당간당하게 가을을 움켜쥐고 있었고, 날카로워진 바람결에 고단했던 낙엽들이 축포가 되어 떨어졌다. 이파리비가 세차게 내리기에 나는 그녀의 팔에 깊숙이 팔짱을 꼈다. 폭신한 낙엽 이불이 덮인 늦은 가을의 골목을 고이 지르밟으며 함께 정성스레 헤맸다.


지금, 함께, 먹어야 할 것을 찾았고, 당당하게 지갑을 열어 넉넉하게 붕어빵을 주문하는 그녀는 비장했다. 시리도록 휑한 길 한복판에서 김이 폴폴 나는 붕어빵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꼬리가 더욱 바삭하게 익은 붕어빵을 들고 머리부터 크게 베어무는 야무진 입매나 된통 덴 혀끝의 감각, 베어문 사이로 이는 팥연기 같은 것들이 함께라는 시선 사이로 포개졌다.


구운 이의 정성 때문인지, 갓 구운 빵이 야멸차게 달랜 추위의 탓인지, 소중한 이가 내어준 귀한 마음 덕분인지 말로 할 수 없는 맛이 났다. 그리하여 그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새뽀얀 연기가 눈앞에 자꾸 서려 당신이 보이지 않는 탓에 입안 가득 넣어버렸던 이나 먹어도 삼켜도 가시지 않던 고팠던 마음 같은 것들만 기억난다.



유난하게 욕심스럽고 따뜻했던 순간이 이 계절, 이 즈음의 도돌이표가 되어주. 그렇게 조금 더 시린 날을 기다린다. 꼬리가 유난히 바삭하게 익은, 넉넉히 채운 앙꼬 탓에 팥빛으로 배가 터진 붕어빵을. 달콤함을 마저 잃어버린 초콜릿사람은 '지금'과 '함께'를 좋아하는 당신과, 조금 더 달콤해질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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