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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ㅡ Oct 18. 2023

만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요?

- 지독한 스크루지의 서막 -


아이가 교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절 때 받았던 용돈을 모아둔 토끼지갑을 크게 열었다. 그리고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고.

"엄마! 나 딸기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거 못 참겠어요. 다녀올게요!"

쿵.


평소에 그들의 아토피 질환으로 간식을 구비해두지 않는 편이므로 운동회 준비로 땀을 많이 흘렸던 날, 달콤함에 극한 갈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신이 나 달려 나간 만 원짜리 한 장.

접근불가한 너의 보물창고



울산에서 살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와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혼자 벌어 생활할 수 있다고 야심 차게 선언하고 올라온 터였으므로 당장의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몇 달간 혼자 벌어 생활해 보니 대강의 수입과 지출이 톱니바퀴처럼 꾸역꾸역 맞물려갔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더디게 움직였던 날, 수중에 현금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월요일은 과외수업료를 받기로 한 날이 주말만 버티면 되는 일, 다음날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아껴두었던 만원을 출금할 작정이었다.


몸을 곧이 펼 수 없던 조그마한 방에서 살았다. 감히 냉장고는 꿈꿀 수 없었으며 방범창과 창문틀 사이엔 유일한 비상식량, 물이 있었다.


조릿조릿한 마음으로 맞이토요일, 자동화기기에 들러 '1만 원' 출금요청 버튼을 눌렀지만, '잔액부족'으로 출금불가란다. 분명코 내가 소복이 아껴두었던 비상금, 만원 있을 텐데. 옆에 놓여있는 긴급전화기로 은행과 연결을 해보려 해도 쉽지 않았고, 눈앞이 흐릿하게 아롱거렸다.


한숨 후에 깨달았다. 고이 아껴두었던 만원, 그것은 주말의 출금수수료를 제하고 나면 만원에 미치지 못하므로 출금불가하다는 것. 몇백 원의 수수료 때문에 주말의 끼니를 책임져줄 만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종일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배가 아프도록 고파 쓰러지듯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이 소심이는 주변의 친구에게 만원만 빌려달라는 이야기도 할 줄 몰랐다. 참는 게 더 쉬웠다.


그러고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월요일 오전 수업에 온 친구와 매점에 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었다는 것, 살 것 같았다. 그 이후로 난 백 원짜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절대 소홀하게 대하여서는 안 되는 돈.


만원은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눈부시게 희망적인 금액.



그런 때에도 부모님에게 돈을 구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걱정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돈을 구한 적이 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즈음 의식이 돌아왔을 때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며 가족들이 그녀의 고향, 제주로 그녀를 옮길 거라고 했다.


곁에 있고 싶은데 제주도에 다녀올 차비가 없었다.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 그땐 저가항공사들이 부재할 때라 더욱 그랬다. 모든 시간을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단번에 구할  없었다. 시간이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전화를 걸어 묵직하게 말을 냈다.


"난 동생도 잃어봤는데 친구가 죽는데 뭐가 그리 슬프니."

엄마가 말했다.


그 말은 '너무 슬퍼하지 마. 그런 일을 겪을 수도 있는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 지나갈거야.' 였을 것이다. 나를 도닥거리려던 말.


그렇게 난 그때의 경제적 상황은 넘길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슬픔의 다름과 그 무게, 해독이 필요한 반어적 표현들,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독립 그리고 그런 것들.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기차역에 고요히 데려다주던 아빠는 내가 내리려는데 이름을 불렀다.

"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놔뒀다가 비상금으로 써."


꼬깃꼬깃 오천 원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만 원짜리까지 뒷주머니에 챙겨 온 돈뭉치를 건넸다. 본인은 필요 없다며 얼마 되지 않은 용돈으로 한 달을 살아가는 당신을 알기에 그 꼬깃꼬깃한 다정함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거절하지 못했다.


그것 또한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절실했던 작고 네모난 종잇돈, 말로 내지 못하고 다른 형태로 전해지는 다정함의 모양, 묵직한 슬픔의 무게 그런 것들.



비슷한 부분들 다른 감각으로 전해졌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듬쑥하게 키워냈다. 나를 올곧이 세우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그느르기 위해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었고 조금은 지독해지더라슬픔은 감추는 편이 낫겠으며, 다정함이 어떤 형태로든 전해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지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진득하게 힘이 들 때 함께 머무를 정도의 여유는 부릴 수 있고 슬픔은 누구보다 잘 감추어낼 자신이 있으며, 숨겨낸 자리엔 다정함을  수 있는 반달눈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나의 반달눈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대도 버려버리지 못했다. 방법을 몰랐으니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나는 지금 슬프다고, 지쳤다고 말로 내기 어려운 회색의 마음들소곤소곤 솔직히 내어보는 것.


솔직하면 안 된다고 착각했다. 그러니 반달눈의 가면을 쓰고 이제껏 살아왔던 것이다. 부모님께는 언제나 행복해 보이고 가족들에겐 더 크게 웃고 있는 가면,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가면을 쓴 나로 기억되 싶지 않다. 나 또한 아이들을 날 것의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다. 아이가 슬퍼하면 안아주고, 화가 나면 그러하니 안아주고, 신이 나 보이면 다시 안아주고 싶다.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보여줄 때 더없이 보드랍게 사랑해주고 싶다. 말로 내는 일에 서툰 나는 그렇게라도 감이 잡히지 않는 말캉말캉한 감정들을 알려주고 싶다.




아이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담은 채로 돌아왔다.

"이거는 엄마 먹고 싶은 거 사 먹어요!"


미처 내 것은 사 오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지 남은 잔돈, 팔천오백 원을 내 손에 쥐어줬다.


주말 동안 나의 끼니를 다 메꿀 수 있었던 돈. 따땃하게 밥 냄새가 나는 고슬고슬한 돈이다. 종잇돈에 네 마음이 포개어져 구깃구깃했던 것이 보들보들 펴지고 나서는, 눈물 나도록 입안이 달콤해졌.


네 토끼지갑 안에 내게 줄 것이 더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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