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어야 하는 나와 그냥 나이고 싶은 나와의 간극
"OO어머니, 그런데 소방관이시라고 들었어요."
흠칫 놀라서 얼굴이 굳어짐을 느꼈다. 뭐라고 뒷말을 해야할지 몰라 사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나도모르게 내뱉은 말이란
"아.. 네 그렇게 되었어요.."
이럴때는 말을 꺼낸 상대도 민망해지고 나도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상대는 내가 불편한 말이라도 했나 싶어 걱정이고 나는 내가 의도치않게 드러나느 순간을 맞딱드려 당황스러운 것이다. 나는 괜히 방실방실 웃고있는 아이의 옆모습을 가만히 흘겨보다 화제를 급히 돌렸다. 아휴 요번 여름에는 유독 습한것 같아요. 그러잖아도 에어컨 냉매가 새서 틀지 못하고 있는데 올 여름은 다 났네요. 큰일이에요 큰일.
일전에 아나운서였던 백지연 작가가 쓴 책들을 골라 읽던 때가 있었다. 특히 그녀가 쓴 뜨거운 침묵은 몇번이나 돌려 읽었는지 모른다. 내 성향이 누구에게 나를 쉬이 드러내지 못하는 지라 침묵을 지키는 때가 많았는데 이것이 스스로 사회생활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게했다. 그 책을 읽고 침묵이란 차갑게 식어있는 상태가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안도하게 했던 그녀가 쓴 다른 책인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마라.'는 이상하게 그 책 제목부터 나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삶이란 무릇 '무엇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던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지루하리만치 어른들이 입에 달고 살던말, '그래, 넌 그래서 나중에 뭐가될래?' 그리고 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적어내던 장래희망 조사칸은 내게 늘 무언가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움직여야만 할것을 암시했다.
그래서 무언가 되기 위해 살아냈다. 이것은 비단 나만 그런것이 아니고 밖으로 일을 나가시는 엄마, 아빠부터 시작하여 보살이 되고싶어 절에 나가시는 할머니와 내 주변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내 주변에 어긋남 없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것보다 해야할 것, 그리고 되고싶은 것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숩쉬듯 당연한 것이기에 한번도 그 대 명제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마라? 아님 그럼 뭐 어떻게 살라는 말인거야?'
결국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그것도 씩씩 화를 내면서. 몇번을 다시 읽어내려 도전했지만 결국 그 책은 머릿말 부분까지만 들추어보다 나보다 더 잘 읽어낼 것 같은 사람에게 양도하였다. 나는 결국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마라에 대한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기로 선택했던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친구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OO야, 학교에서 엄마가 소방서 다닌다고 이야기 하니?"
"응. 내가 이야기 하면 다른사람들이 우와- 하고 놀라."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하면 너는 어떤데?"
"그냥 기분이 좋아. 다들 대단하다, 멋지다. 이야기 하니까"
그게 불편했는가 보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멋지지도 않은데 그런 찬사를 받을 때 마다 나는 꼭 죄를 짓는것만 같다. 모두들 내 실체를 알면 에이 별거 아니면서 하고 뒤돌아 서고 말걸. 나는 몸서리를 치고 아이에게 당부했다. 어디가서 엄마 뭐한다고 이야기 하지 마. 아이의 눈에 궁금증이 차오름이 느껴졌다. 차마 엄마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이야기 하지 못하고 그러면 그런줄 알라며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며 집으로 향했다.
사춘기를 생각보다 심하게 앓았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그시절 나를 그렇게 밖에 양육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여건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지만 너의 감정이 맞고 니 감각이 옳아 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오지 못했기에 사춘기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화두는 나는 대체 누구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에 목숨을 걸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내가 느끼는 것이 옳은것인지에 대한 확신히 없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치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준을 나 아닌 외부에서 찾고 그것을 향해 부단히 달려갔다. 나는 본래 날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는데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며 온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아이를 낳고 바로 복직을 할 생각이었다. 배가 산만해져서 소방서로 출근하면 주변의 선배들로부터 너무 휴직을 오래하면 감떨어지니 아이 돌만 지나고 복직하는 것이 너의 커리어에 있어 장기적으로 득이 될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를 연달아 둘을 낳고 기르다보니 다시 일터로 나가는 것에 망섦이 생겼다. 그렇게 한해 두해 휴직을 한것이 장장 거의 6년이 다되도록 휴직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복직을 하는것에 엄두가 나지 않아 신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퇴사 하면 안될까? 신랑의 벙찐 얼굴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즈음에 전세가 만기가 되어 새 아파트를 분양받고 없는 살림에 중도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있었을 때였다. 신랑은 지금껏 지켜온 타이틀이 아까우니 더 다녀보자 다독였고 결국 6년의 휴직을 끝으로 근무처로 돌아갔다.
나를 6년이라는 시간동안 눌러앉힌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게있어 일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나의 시간을 오롯이 아이에게 내어주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나의 부재가 곧 아이에게 나와같은 정체성의 부재를 겪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최대한 아이 옆에 붙어있고자 했다. 그렇기에 그것은 아이를 위했다기 보다 철저히 내 자신을 위한것이었다. 혹여라도 아이가 나와같은 화두를 내뱉을 때 엄마는 도대체 어떠한 결핍을 내게 주었기에 내가 이모양 이꼴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내 자신을 차마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것만 같았다.
나는 참 되는것에 걸려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엄마라면 이정도는 되어야지라는 생각에 읽지도 않을 육아서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쳐박아 두었다. 아빠라면 이정도는 되어야지라는 생각에 지금 돌아보면 남편을 참 많이도 달달달 볶았었지 싶다. 내가 아이들에게 이정도는 했으니 아이들은 당연지사 이정도는 되어야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한글공부 시켜도 낫놓고 기억자 모르는것같은 행태에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라 글자를 알려주는 나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소방관이라면 응당 이정도는 되어야지라는게 지금 내게 없는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짬내서 운동한다하더라도 배꼽밑에 툭 티어나온 아랫배와 조금만 무거운것을 들을라치면 아파오는 허리. 무엇보다도 어떤 상황이 와도 당황하면 안되는 강한 정신적 멘탈이 있어야 하는데 귀 옆으로 벌레만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으악! 하며 온 수선을 떨어대는 꼴이니... 게다가 무엇보다도 친정가족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내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것에 원인이었을지도 모르는 내가 감히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아이를 낳기 전 사이렌을 켜며 운전대를 잡던 나는 이 일이 천직인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내가 가는 이 길을 가면서 한치의 의심이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주문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 진심으로 원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면 내가 가진 기준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일이 그야말로 천지빛깔이다. 아이는 매 순간 내게 묻는다. 엄마, 엄마가 가진 기준이 중요해요? 내가 중요해요? 그럴때면 나는 그러고 싶다. 얘가 얘가 당연한소리를 묻네. 바로 니가 더 중요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입을 다문다. 나는 내가 가진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못하는 쫄보 그 이상도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주변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있어 하는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지만 정말이지 묻고싶다.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감각은 어떤것일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오랫동안 그 일을 하기 위해 준비과정을 거치고 나서 누릴 수 있는 무엇일까 아니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일에 내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비로소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일까
사춘기를 지나 때아닌 오춘기를 앓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