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손잡이

[작가:영웅] 정태

by 영웅

기억이 흐릿하게 나는 어린 날, 내 몸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등교하던 초등학생 때,

구멍 난 운동화가 뒤늦게야 부끄러웠던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저렴한 옷들도 몇 벌 없어 겨우 돌려 입던 대학생 시절까지


하루를 마무리하는 집, 저녁이 드리우는 집 안에는 비워지는 푸르스름한 소주병이 있었다.

매일 가스레인지 위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압력추의 소리도 압력밥솥이 내뿜는 온기도

점점 식어가는 소주의 온도와 비워지는 소주잔만큼 채워지는 욕설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느 황무지 속 도시개발로 조금씩 들어서는 아파트들

그 많은 집 속에 내가 있는 그 집

그 집은 여름에도 발이 시렸고, 겨울은 바깥보다 추웠다.


'다녀왔습니다'

낡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서 주위를 둘러본다.

알루미늄 은색 샤시에 연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베란다에는

어린아이 키만큼은 자라야 되는 화분들이 몽땅 잘라져 뾰족하니 윗부분이 노랗게 변해있었다.

수없이 던져진 리모컨은 마트에서 그중 제일 저렴한 것이

대단히도 끈질기게 버틴다 싶었지만 결국 또 새것으로 다시 들였다.

깨지고 부서질만한 건 이미 다 으스러져 버려진 휑한 우리 집.

더 이상 깨질 수 없는 종이들 싸구려 플라스틱들

아직 잘 버티고 있는 단단한 가구들만이 겨우 제 몫을 해내고 있다.


그 사이를 지나 내 방문 손잡이를 잡는다.


서쪽 창문으로 지는 해가 드리우는 따사로움과 춘추절의 포근한 바람에 낮잠에 취한 어느 토요일

낮술에 취해 비틀 거리며 들어오던 정태.

'아부지가 들어오는데 인사도 안 하나'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욕설 들

사춘기 소녀답게 낮잠에 덜 깨 반항하는 나

그리고 정태 손에 들려있는 부엌 작은 아일랜드 식탁의 등밭이 없는 동그란 철제 다리 의자.

황급히 방문을 닫는 나.

'쾅'

의자다리 하나가 방문을 찍는 소리.

정태의 발에 많이도 맞은 내 방문.


그렇게 가운데가 움푹 파인 아슬아슬한 내 방 방문에

작디작은 손잡이를 잡는다.

그 작은 손잡이에 달린 잠금버튼 하나가

정태를 피하는 유일한 버튼이었다.


'누나야 왔나'

동생이다.

이 모든 시끄러움을 어지러움을 함께 나누는 동생.


일그러진 내 방문 밖이 시끄러운 날

제일 먼저 헐레벌떡 내 방으로 달려와 내 방문을 잠그던 어린 동생

같이 이불속에 숨고 책상 밑에 숨고

집안이 조용해지고 엄마가 훌쩍이며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아빠 잠들면 우리도 몰래 나가 엄마 찾아오자' 하며 끄덕였다.

모르는 척한 건지 잠이 든 건지 엉망인 거실 사이로 팔하나를 이마에 얹고 있는 정태를 두고

숨도 꾹 참고 유리 조각이 일그러진 거실을 살곰살곰 빠져나가 현관문을 열고 닫으면

그것이 슬픔인지도 모르고 신나서 서로 소리 없는 환호를 지르곤 했다.


세월이 지나 동생은 180이 훌쩍 넘어 더 이상 책상 밑은 숨지 않아도 되었고

나는 나와 내 동생처럼 사랑스러운 남매를 품었다.


정태의 시끄러움을 다 받아주고 어린 나와 동생이 방에 숨어 있는 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가 바깥 벤치에 앉아있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눈물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작은 나와 동생이 몰래 나와 엄마 찾아 달려갔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우리를 보며

이 시끄러움이 당연한 우리를 보며

그저 엄마 찾았다고 어둑한 밤 달빛아래 신나 웃음 짓는 우리를 보며

엄마,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바삐 출근준비하는 금요일 아침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물 한 모금 마시고

아이들 물통을 하나하나 채워 가방에 넣어주며 다시 점검했다.

일주일의 마지막 평일 놓치는 게 있을까.

알림장을 다시 열어 초등학교 3학년 둘째의 알림장에 미쳐 보지 못한 반티를 발견했다.

특별 활동을 하는 오늘 모자도 물통가방도 다 아이가 스스로 준비해 두었는데

반티는 깜빡했나 보다.

아직도 엄마 품이 좋은 둘째는 초여름으로 더위가 왔다가 저녁에는 가시지만

덥다는 핑계로 엄마옆에서 시원한 거 틀어놓고 잘 꺼라며 붙어 자 아직도 곤히 자고 있고,

덕분에 사춘기가 올는지 많이 새침하지만 자는 모습은 아직도 아기 같은 엄마냄새 찾는 첫째까지

함께 옆에서 한밤 중이다.


반티와 시원한 바지하나를 꺼내 둘째의 옷장 앞에 두고

곤히 잠든 둘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둘째야'

아이가 잠들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떴다.

이른 아침 내가 움직이는 소리로 잠이 어느 정도 깼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깜짝 놀란 둘째를 안고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엄마야 엄마'

다시 나를 꼭 안고는 조용히 선잠에 든다.

'오늘 반티 입고 가야 돼서 엄마가 옷장 앞에 내놨어'

끄덕끄덕 다시 안아주는 둘째를 쓰다듬어본다.


이른 아침 작게 이름 부르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이리 깜짝 놀라 깨는 나의 아기 나의 둘째

그때의 내 동생도 우리 둘째 같이 작고 하얀 손을 하고 엄마를 부르며 다녔는데

누나가 있으면 슬픔이 슬픔인 줄 몰라 보였던

콜라 맛 쮸쮸바를 야무지게 먹던 우리 동생은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팔하나를 이마에 얹어 이마와 눈을 가리고 잠들던 정태

이마에 얹어진 팔 아래 미간이 찡그려졌는지 펴져있는지

그것마저 아슬아슬하던 그때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 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