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영웅] 정태
여덟 살 조금 넘어 보이는 딸과 추운 겨울 시외버스 터미널 입구에 들어선 정태는 멀끔히 차려입었다.
오늘은 딸과 함께 처갓집에 가는 날이다.
겨울 감기가 심하게 걸린 아들을 데리고 시내버스 시외버스 갈아타며
날 추운 날 나서기엔 고생길이 될 것 같아 정태는 부인과 논의 끝에 딸과 둘이 그 길을 나섰다.
차표를 끊고 벽에 붙은 얼룩 가득한 낡은 플라스틱 의자들 중
남는 자리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다
터미널입구부터 코끝을 자극하던 푹 퍼진 어묵 익는 냄새에 이끌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 앞에 섰다.
'어묵하나 물래?'
딸에게 물어본다. 딸은 먹겠다고 한다.
주머니를 뒤져본다.
차표를 끊고 남은 동전들과 대구까지 가서 써야 되는 돈들
또 내려올 때 필요한 돈들, 담배도 한 갑 사야 되고,
정태는 쭉 계산해 보았고 남는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태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어묵하나만 주소' 하고 어묵집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딸은 서있고 싶다고 했다.
뜨끈한 국물에 길게 썰어진 대파와 담겨 뭉근히 끓고 있는 어묵들 옆으로 번데기가 소복이 올라가 있었다.
금세 어묵하나가 긴 꼬치에서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나눠 놓은 것들 중 하나로 옮겨지고
딸의 손에 쥐어졌다.
정태는 그사이 동글 납작한 빨간 플라스틱 잔들이 여럿 엎어진 것들 중 하나를 골라 어묵국물을 두 번 펐다.
어묵을 꼭 쥔 손 아래로 보이는 딸의 손목에는 터미널에 오기 전 시장에 들러 정태가 사준
인어공주 시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빨간색 가죽의 줄이 달린 손목시계 가운데에는
숫자 두 개가 가운데 껌뻑거리는 점두개를 사이에 두고 시간을 알려주었고
그 곁으로 밝은 갈색의 풍성한 머리를 옆으로 길게 쓸어 넘긴듯한 인어공주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멀리서 버스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태는 딸과 나란히 버스 쪽으로 걸었다.
딸은 몇 입 베어문 식은 어묵을 들고 걸었다.
딸은 오늘 오전 지 어미가 잔머리 하나 없이 빠짝묶어준 머리를 하고
주위엔 관심도 없는 냥 앞만 보고 걸었다.
아무리 봐도 신발이 작아 보였다.
빨간 줄의 시계를 사고 시장을 나오는 길 눈에 띄던 신발가게에서
보름치 술값과 맞바꾼 반짝이 분홍 구두였다.
부인이 알면 또 한바탕 싸움이 날 테지만 상관없었다.
대구에 도착하니 겨울의 짧은 해는 기다려주지 않고 저물어 있었다.
지체 없이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서 보는 대구의 이른 저녁은 불 켜진 상점들로 반짝였다.
버스가 가구거리를 지나갈 때쯤
겨울밤 형광들 불빛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나전칠기들에 정태도 딸도 시선을 빼앗겼다.
정태는 딸에게 나전은 전복껍데기나 진주가 나오는 조개의 껍질을 얇게 깎아 반짝이게 만든 장식이고
칠기는 옻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칠하는 것으로 광택이 나고 방수도 되고 튼튼해지기 위해 칠하는 작업이라 그걸 합쳐 나전칠기라 부른다고 설명해 주었다.
반짝이는 상점들처럼 반짝이는 눈을 하고 끄덕이는 딸에게
'저거 이름이 뭐라고?'
'나전칠기'
'오냐 그렇지'
정태는 괜스레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딸과의 대화가 들리도록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크게 되묻고 웃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딸은 발이 아프다고 했다.
역시 신발이 작았다.
딸을 업고 조용히 밤이 내려앉은 대구의 겨울 골목길을 걸었다.
나지막한 평지 양쪽으로 가운데 골목을 두고 집들이 나열된 주택가는 제각각이지만 회색 벽돌담이 나란히 올려져 가지런해 보였다.
비슷한 대문과 돌담들 사이를 지나 검정색 낯익은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빨간 이층 벽돌집의 일층 불투명한 창문 젖혀진 커튼의 그림자 사이로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으로 있는 나무색 문이 활짝 열리더니 손아래 처남과 처제가 나왔다.
반갑게 맞아 주는 장모님과 처갓집 식솔들은 고단새 업혀 잠든 딸을 방에 눕힐 수 있게 이불을 깔아 주었다.
정태는 딸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한 잔, 두 잔 넘어가는 소주로 참았던 하루의 갈증을 풀었다.
정태가 샛방살이 하는 작은 집을 대단스럽게도 풍비박산 내 버린 날.
외할머니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대구에서 울산까지 택시를 타고 늦은 밤 달려왔다.
뒤이어 택시 한 대가 더 도착했고 큰외삼촌이 외할머니의 신발을 들고 내렸다.
택시 안에 있던 그 긴 시간마저도 진정시킬 수 없는 놀란 마음과 걱정을 안고 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방하나와 바깥 부엌 있는 작은 샛방안에는
어린아이 발하나도 디딜 틈 없이 모든 물건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다리 하나 접혀 내던져 있는 동그란 밥상과 밥상 위에 있었겠거니 짐작만 가는
음식, 냄비, 수저, 그릇들은 뒤엎어져 거꾸로 또는 비스듬히 바닥 위에 자리 잡았고
곁으로는 소주병들이 멀쩡한 것과 깨진 것이 족히 네댓 병은 될 것 같았는데
재떨이였을 법한 것과 뒤엉켜 있었다.
혼수로 사간 전기밥솥은 뚜껑이 열린 채 까만 전선을 늘어뜨리고 그것들 사이에 누워
그리 많지도 않았던 닦아 쓰던 살림살이들과 함께 조각날 만큼 나있었다.
'애들이고 머고 집에 가자 애들은 즈그 성씨들이니까 즈그가 건사하겠지 가자!'
외할머니는 소리쳤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었고 큰외삼촌은 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정태를
굳게 다물었지만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입술과 힘들어간 아래턱을 하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딸의 손을 잡아끌던 외할머니는 침묵이 한참 지나간 후에야
그 손너머 딸의 등뒤에서 포대기로 싸여 곤히 잠든 갖난 손자와
그 반대편 손을 꼭 잡은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한 채 서있는 다섯 살 난 어린 손녀가 보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의 손을 놓고 부엌 한편에 앉았을 때
엄마는 외할머니의 상처투성이 맨발을 볼 수 있었다.
외삼촌은 말없이 나뒹굴고 있는 밥상과 유리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간간히 잘못 밟고 잘못 건드려 유리가 박힌 손과 발에도
그 누구도 소리 내지 않았다.
그 날밤 그들을 소리 내 아프게 한 것은 간간히 박히는 유리보다 착잡한 마음이었다.
어린아이 두 명은 뉘일 공간이 생겼을 때 나와 동생은 뉘어졌고
눈을 떠보니 외할머니도 큰외삼촌도 보이지 않았다.
집은 한 밤의 꿈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수없이 내던져지는 밤과 제자리로 돌아오는 아침이 지나
나는 인어공주가 그려져 있는 새시계를 차고
정태와 어제 도착한 외갓집에서 이른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아침이면 아무 일 없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들
그것이 제자리는 맞았을까.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자리 찾아 돌아가는 것들 사이로
끝내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찢어진 장판, 얼룩진 벽지, 일그러진 마음
일그러진 마음은 더 일그러질 곳 없는 채 다시 던저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인어공주처럼 스스로 물거품이 되길 바랐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외갓집 큰방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걷기 싫어 정태의 등에서 일부러 잠든 척을 하다가 진짜 잠이 들었나 보다.
불 꺼진 방 닫힌 방문과 문틀 사이로 하얀빛이 희미하게 들어왔고
외삼촌들과 이모들 외갓집 식구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방안까지 기분 좋게 들어왔다.
불 꺼진 방 한쪽에서 사촌언니 두 명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다가 내가 일어난걸 눈치챘는지
'일어났다' 하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먹을래?'언니 한 명이 조용히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에게 자고 일어난 여덟 살 조금 넘은 숫기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더 이상 물음은 없었다.
꼴깍.
먹고 싶었다.
먹는다 할걸.
문이 덜컥 열렸다.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불이 켜졌다.
'일어났나' 정태다
정태는 두 손을 내 볼과 이마에 하나씩 얹었다.
따뜻한 방에서 얼마나 곤히 잠들었는지 빨갛게 익은 내 얼굴에
정태가 올린 차가운 두 손은 시원한 아이스크림 같았다.
'니도 아이스크림 물래? 묵고 싶나?'
고개를 저었다. 언니들한테는 안 먹는다 했는데 정태한테 먹고 싶다고 하면 거짓말한 게 탄로 날 테니까.
'나가자 아이스크림 사주께. 일어나자'
내가 고개를 저었는데도 정태는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했다.
나는 소리 내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정태는 나에게 아이스크림 하나와 과자 하나를 사주었고
나는 추운 겨울 늦은 밤 정태 옆에서 반짝이 구두에 발이 아픈줄도 모르고 껑충껑충 뛰며 걸었다.
다음날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인어공주 시계 한번 정태한번 반짝이 구두 한번 정태 한 번을 보았고
엄마는 마치 본인 시계와 구두인 양 입꼬리를 올리곤 빨간색 시계를 다시 내 손목에 채워주었다.
시장에서 보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던 반짝이 구두는 내 발에 맞는 것이 없다며
옆의 반짝이 없는 것을 추천해 주는 주인아저씨의 말에
발가락도 제대로 펴지지 않는 것을 맞다고 우겨 신었다.
엄마의 손에 들어간 반짝이 구두는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간간히 반짝이던 것들도
머물러 있던 일그러진 마음을 마주하면
인어공주처럼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낮과 밤이 바뀌도록 제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정태 왼쪽 가슴 주머니에 든
담배 한 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