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영웅] 정태
처음 그 차를 봤을 때 나는 집 앞 조그만 텃밭에서 텃밭일을 하는 엄마를 따라 놀고 있었다.
흐드러진 햇살, 언덕 위 여름을 맞이하는 녹색의 풀이 길게자라 우거진 낡은 도로 사이로
정태가 운전하는 정태의 첫 차가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1997년의 녹색 중고 1세대 아반떼 J1.
가까이서 보면 반짝거리기도 하는 것 같은 녹색 아반떼.
초등학교 4학년 옆집도 윗집도 옆짝꿍도 뒷짝꿍도 다 있는 차
우리 집만 없던 차, 그 차가 드디어 생겼다.
동생과 나는 신이 나 껑충껑충 뛰었다.
정태는 그 길로 엄마와 나 동생을 태워 고향 시골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그 해가 되기 몇 해 전 돌아가시고 시골집은 할머니 혼자서 지키고 계셨다
울산에서 청송까지 한참을 달렸다.
정태와 엄마가 둘러앉아 호밖잎이나 고구마순을 다듬거나, 비 오는 날 칼국수 반죽을 밀 때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의 트롯노래가 차 안 가득 흘러 퍼졌고 각자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회색 패브릭 시트와 썬텐되지 않은 자동차 창문을 그대로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참 따사로웠고
음정 박자 맞는 것 없이 불러 대는 정태와 엄마의 노래에 우리 남매는 마주 보며 계속 웃었다.
정태는 먼저 선산으로 향했다.
막걸리와 소주를 잔뜩 사서 선산에 계신 조상님들께 올렸다.
그늘 없는 뜨거운 땡볕아래 마른풀과 흙을 서걱서걱 밟으며 올랐다가
해가 뒤로 넘어가 선선해진 오후 무렵에서야 내려왔다.
앞장서던 정태의 걸음이 거의 다 내려와서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정태가 멀어지고 자동차가 가까워지자
트럭인지 경운기인지 이미 홀연히 사라져 버린 탈 것 한대가
정태의 아반떼 옆구리를 대단스럽게 쿡 찍고 흰색 페인트만 남기고 가버린 것이 보였다.
나는 찌그러진 차보다 정태의 반응을 살폈다.
어김없이 욕지거리가 날아왔고
엄마는 다급하게 옷소매로 차를 닦으며 액땜이라고 했다.
욕지거리를 날리던 정태는 화가 나 보이기도 했지만 꾀나 속상해 보였다.
블랙박스가 없던 때 사소한 스크레치는 낭만이 되던 시절이라지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내차를 누가 그렇게 대단스럽게 해 놓고 지나갔으면
좋은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정태와 엄마는 더 이상의 내색 없이 애꿎은 막걸리 한통을 바퀴 네 개에 다시 붓고
진지한 얼굴로 조상님께 절을 올렸다.
후로도 정태의 차들은 정태의 손에 망가지는 적은 없었다.
정태도 차는 꾀나 소중했나 보다.
할머니께 마무리 인사를 드리는 일정으로 정태는 그날의 고사를 마무리 지었다.
할머니도 정태의 첫차에 움푹 파인 자국에 대해 별 내색 없으셨다.
선 자리에서 정태는 다시 우리를 태워
집으로 내려왔고 내려오는 길도 차 안에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장거리 운전을 처음 한 날
정태는 그날 딱 하루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날을 시작으로 정태는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여러 번,
왕복 대여섯 시간 남짓한 고향길을 할머니를 뵙기 위해 운전을 했다.
고향에 혼자 계셨던 할머니.
어느 날은 가보면 고모도 큰아빠도 있었고 사촌들도 잔뜩 와 즐거웠고,
어느 날은 가는 길에 삼거리 식육점에서 냉동 삼겹살도 잔뜩 5,000원어치 사갔다.
어느 날은 도착해 눈을 떠보면 별들이 쏟아질 것 같은 까만 밤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고
어느 날은 이른 아침 갔다가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할머니댁이 가까워지는 것을 냄새로 알아채곤 했다.
밥 지어지는 듯한 냄새, 무언갈 태우는 듯한 냄새
여름엔 벌레 날리고 겨울엔 고요한 시골의 그 냄새가 참 좋았다.
잔잔히 들리는 개울물 곁으로 가 속을 한참 들여다보던 봄
아직 어린 열매들이 귀엽게도 앙증맞아 보여 몰래 따먹다, 덜 익은 떫은맛에 켁하고 뱉어보던 여름
저녁 무렵 조용한 방에 누워있다 툭! 하는 지붕소리에 놀라하면 감홍시 떨어는 소리라던 할머니의 가을
모두가 밭일하러 가지 않아 좋았던 겨울
그렇게 계절이 반복해 흘렀고
정태의 자동차는 조수석을 차지하던 엄마가 내리고
뒤이어 뒷좌석의 우리도 내렸다.
정태의 차도 삶의 모양도 곡예곡예 바뀌었지만
정태의 자동차는 늘 고향길을 향해 달렸다.
아마 정태의 차들은 할머니댁 시골 앞마당을 더 오래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태의 차가 더 이상 고향길에 오르지 못하게 되던 날
늘어난 나의 식구들을 태운 차와 동생네 식구의 차 두대가 그 길에 올랐다. 정태의 사진과 함께.
180 정도 되는 키의 정태, 총각시절 사진을 보면 참 말랐던 정태.
중년이 되면서 점점 살집이 늘어나 뚱뚱하진 않았지만 보기 좋은 큼직한 체구였던 정태.
모자 하나를 삐딱하게 쓰고 까만 얼굴에 담배를 물고 있던 정태.
엄마와 헤어지고 한참만에 우리 앞에 나타난 정태는
오랜만에 보는 우리 앞에 깨끗한 신발과 청색 작업복을 걸치고
작은 은색 중고 마티즈를 데리고 왔다.
엄마와 헤어지던 해 나는 4년제 대학교 졸업반을 앞두고 있었고 동생은 고3이었다.
그 해까지 정태는 거진 3년을 이른 아침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용돈은 장학금과 과외, 아르바이트로 충당되었고,
더 이상 엄마의 희생을 갈아 넣을 수 없을 때쯤
정태의 차가 쌀, 소주 그리고 두부한모가 되었고 우리 집은 자동차 엔진소리만큼 한참을 시끄러웠다.
부엌 식탁에 앉은 정태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노'
그 한마디를 남기고 집 밖을 나갔고
식탁 위에는 비우다 만 소주 잔과 소주병, 삐뚤게 내려진 젓가락,
손대지 않은 두부한모가 놓여있었다.
며칠 뒤 1층 현관에 놓인 우리 집 우편함은 대단히 찌그러져 있었다.
정태가 떠난 우리 집은 담배냄새가 사라졌고
부서진 물건도 잘라진 화분도 술병도 없었다.
낮은 바삐 비어있었고 밤은 따뜻했다.
여전히 니코틴이 묻은 벽지, 부서진 방문, 망가진 우편함과 초인종은 그대로지만
집이 집이 되었다.
남겨진 두부한모가 정태의 미련이라면
남겨둔 두부한모는 우리의 시작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그날
정태는 잠깐의 긴장과 그리움, 서운함을 가득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간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음이 삐죽 나오며 인사하고 만났던 그 재회의 날
어김없이 정태는 술을 마시고 그간의 공백의 힘듦을 술주정으로 대신했다.
책상 밑에 숨기엔 몸집이 너무 자란 성인이 된 우리는
오랜만에 듣는 육두문자들에 꿈쩍대지 않았지만
취기가 잔뜩 오른 정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정태에게 같이 집으로 가자고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소리 지르던 정태.
화가 나있던 정태.
물건을 깨부수던 정태.
매일 술을 마시던 정태.
추운 날 더운 날 일을 가지 않았던 정태.
주유구에 불이 들어온 지도 꽤나 흘러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서는데도
주유소를 그냥 지나치던 정태.
언제나 고집스럽게 무섭던 정태가 가고 문득 생각이 든다.
그런 정태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었을까.
우리가 우리 살던 그 집에 같이 가자고 말 못 하던 그때
정태는 그때 무서웠을까.
내 방 책상밑에 숨어 동생과 불안해하던 나
정태가 잠들기 만을 기다렸다 현관밖에 나가보자고 동생과 다짐하는 나.
작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비며 눈을 뜬 건지 감은건지 깜깜할 만큼 눈물이 나던
'아빠 제발 그만하세요' 외쳐보던
그때의 나만큼 그때의 우리만큼 무서웠을까.
'아빠 잘 가'
얼룩진 청색 작업복, 눌려진 곱슬머리, 어느새 다시 구겨신은 운동화, 어그적 어그적 팔자걸음
그 너머로 날려오는 담배연기
그 익숙한 뒷모습을 덩그러니 바라보며 미워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소원 비슷한 것, 바람 비슷한 것을 꾹꾹 씹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