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작가:영웅] 정태

by 영웅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의 역사적인 순간이 오던 때

대한민국의 시계는 축구공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한국인의 일정은 붉은색이 만개하는 곳으로 맞춰졌다.

2002년 6월은 지방 곳곳 붉은 함성이 울렸고 그 함성소리에 정태의 집도 묻어들어갔다.


길거리에서는 여러 단체에서 붉은색 티셔츠 붉은색 응원도구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기도

의류 브랜드들은 브랜드들만의 특색을 넣어 비싼 값에 팔기도 했다.

똑같은 빨간색 티셔츠조차도 어떤 이들은 홀로그램을 뒤적이며 진품과 가품을 구분 지었다.

대단했던 열정과 애국심 가득 묻어났던 붉은색 티셔츠는 그 후 대한민국 전용 홈웨어가 되었다.


승리가 만들어낸 흥분의 시간들과

대한민국 하나 되는 역사적 순간들에

나의 함성은 조용한 집이었고 기분 좋은 정태였고

내 방 방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서쪽노을 바라보아도 불안하지 않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늘어나는 연장전과 승부차기

8강전의 그림 같던 안정환의 골든골로 각각의 함성이 일주일 그리고 보름 더 연장되었다.


함성이 잦아들 때쯤

엄마 옆에 잠들려 이불 깔고 누운 거실에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휴대폰 사줘'

엄마가 시큰둥 하니 대답했다

'왜 일등 했나'

'응'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던 엄마는

피곤에 지쳐 잠이 들랑 말랑 하다 벌떡 앉았다.

'반에서 1등 하고 전교에서 7등 했어'

중학교3학년 1학기 중간고사였다.

엄마는 손뼉을 마주치며 기뻐했다. 엄마의 박수는 나에게도 기쁨이었다.

다음 날 오징어 공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휴대폰 가게에 갔다.

엄마는 약속을 지켰다.

'1등 하면 휴대폰 사줄게!' 하던 툭 내뱉은 그 약속.


새벽 4시, 집 앞 길 건너면 있는 오징어 공장에 출근하던 엄마

겨울이면 해가 짧아 전기장판 이불아래 손을 잠시 넣고 눈물을 훔치다 출근하던 엄마.

정태는 그 겨울에도 그다음 여름에도 느지막이 일어나 텅 빈 집 냉장고를 뒤적였으며

해 떨어지면 슈퍼로 나가 소주 한 병 사들고 모두가 있는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태 스스로가 지켜낸 본인의 안락함은 엄마의 책임감으로 이어졌고

엄마의 머릿결, 살결, 옷가지에는 엄마의 책임감만큼의 오징어냄새가 배어 들었다.


퇴근 후 같이 일주일마다 서는 요일장을 구경하고 준비물을 사러 동네 문구점에 들렀을 때

문구점 주인이 어디서 생선냄새 안나냐고 엄마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킁킁거렸다.

다행히 엄마 손에는 장을 본 고등어 한 마리가 들려있었지만

그날의 기분을 엄마는 20년쯤 지나 나와의 여행에서 반건조 오징어를 사 먹을 때까지도 수차례 꺼냈다.

그 이야기를 하며 오징어를 자르는 엄마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당시 오징어 공장 바로 옆에 학원하나가 확장을 하면서 4층 높이의 새 건물을 지어 들어섰다.

1층에는 유치원이 있고 그 위로는 종합학원이 한건물로 이어져

유치부부터 고등부까지 전체가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3학년, 엄마를 조르고 졸라

연분홍색 도색된 건물 밖만 어슬렁거리다 드디어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지 3개월이 지날 때쯤 휴대폰이 생겼고

1등 상으로 그 달의 학원비를 면제받았다.

키 작은 엄마는 일하다 말고 분홍색 비닐소재의 두꺼운 앞치마,

흰색 위생모와 작업복, 남색의 장화를 신은 채 학원 건물 3층 4층 계단을 왔다 갔다 하며

거듭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갔다.


그리고 두 번의 계절을 못 이긴 채 나도 엄마도 학원 계단을 더 이상 올라가 보진 못했다.


엄마의 오징어 공장은

정태가 한 번씩 찾아와 다 때려치우라고 소리 지르던,

사랑하는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간고사 1등을 해봤던,

초등학생 둘째가 엄마 찾아 달려와 구석에서 잠들던,

자신의 손과 발을 한겨울 새벽 3시 30분으로 만들었던,

달떴을 때 걸어가 해질 무렵 걸어오는 2002년 월드컵 4강의 함성마저 넘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오징어 공장이 문을 닫고도 한참을 우리 집 밥상 위에는 오징어가 올라오지 않았다.


월급봉투와 학원봉투.


집 앞 길건너에 커다란 건물하나를 지어대더니 까르푸라는 창고형 대형 마트가 생겼다.

한 달에 한번 월급봉투를 받아오는 날이면

엄마는 나와 동생을 까르푸에 데리고 가 과자와 과일을 잔뜩 사주곤 했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진심으로 그 과자는 취향이 아니라 엄마를 따라다니며 말렸지만

엄마는 카트를 가득 채웠다.


엄마의 월급봉투는 사랑과 희생이었다.


당시 한국인의 소비습관에 맞지 않는다며 말도 많았고 탈도 많은 서양식 대형마트의 첫 시도였지만

늦은 밤까지 환희 열려있었던 파란색과 흰색의 페인트로 깔끔히 도색된 까르푸는

정태의 월급봉투가 꾸준하던 때면

녹색 시금치가 들어있다 자랑하던 초록색 면의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고,

엄마와 나 동생에게 달떠있는 밤 시끄러운 집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도피처였다.


매일 아침 정태와 엄마가 현관을 나서고 나와 동생도 가벼이 현관을 나서는 날이면

정태의 두둑한 월급봉투도 텔레비전 위에 올려졌다.

그럴 적이면 매일 저녁 정태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온 가족 동그란 좌식 밥상에 둘러앉아 종일 일하고 온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함께 나눴다.

치킨 한 마리가 조각난 고구마 몇 개와 함께 튀겨져 배달되어 올라올 적도 있었고,

삼겹살이 노릇하게 구워져 엄마의 구수한 된장찌개와 함께 올라올 때도 있고,

커다란 고등어 한 마리가 기름 위에 얹어지고 종이에 덮여 앞 뒤로 한참을 먹음직스럽게 구워지다

엄마의 정갈한 밑반찬들 사이에 놓인 때도 있다.

'땡초 넣었데이'

우리 남매에게 간혹 매울 수 있으니 조심해서 먹으라는 엄마의 안전멘트는

매운 걸 좋아하는 정태를 위한 요리라는 마음도 담겨있었다.


정태의 저녁밥 옆에는 매일 소주병, 소주잔이 수저처럼 함께 놓였다.

동그란 밥상 위에 씻고 나온 정태가 유일하게 차리는 공간이다. 소주병과 소주잔.

'소주만 먹지 말고 밥도 많이 드소 그래야 덜 취하지'

소주병이 비어지는 만큼 아까운 건지 표정이 굳어가는 정태와

시끄러움만은 피하고 싶어 열심히 정태를 달래는 엄마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이것만 먹고 얼른 일어나서 주무소'

둘러앉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태의 술주정도 접시 위에 올랐지만

둘러앉아 먹는 따듯한 밥이, '일어나서 주무소'라는 말을 마지못해 듣는 정태가 나쁘지 않았다.


겨우 정태가 잠자리에 들면 엄마는 이제야 퇴근한 것 같은 얼굴로 우리에게 찡긋했고

우리는 거기에 안정감을 느꼈다.


정태의 월급봉투는 안정이었다.


60이 넘은 지금도 회사에 소속해 급여이체를 받고 있는 엄마의 사랑과 희생은 꾸준했던 반면

정태가 주는 안정은 타고난 정태의 꼼꼼한 능력만큼 반비례하는 성실함으로 인해 꾸준하지 못했다.


정태는 우리의 오랜 안정을 견디지 못한 채 전화기 뒤편 콘센트를 뽑았다.

'내 찾으면 없다고 해라'

허공 위에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 해가 뜨고 분주한 아침, 슬며시 열려있는 문틈사이를 바라보면

팔하나를 이마에 올리고 아직 잠이 든 건지

우리가 나가기를 기다리는 건지 정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밤이면 다시 방문이 열리고

현관밖을 나섰다 들어오는 정태의 한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소주병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거실을 지나는 검은 봉지,

정태는 그 안에서 두부 한모를 꺼내 접시에 담고

젓가락 한 짝, 소주잔 하나, 김치를 한대모아 방으로 데리고 갔다.

정태가 방으로 들어갔음을 알리듯 방문이 닫혔다.


정태에게는 그것이 안정이었을까.


정태가 현관문을 나서는 아침과

이불을 둘둘 싸고 이마에 팔을 올려 눈감고 있는 아침,

상반되는 아침과 아침 사이에

거실 텔레비전 위에 조용히 올려놓은 학원비 봉투는 애꿎은 몸살을 앓았다.


흔들리는 가방 속에서 무탈히 오고 가며 열두 번을 반복할 수 있도록

열두 개의 네모칸 속 동그란 도장 하나와 월이 다른 날짜를 달에 한번 적을 수 있도록

튼튼한 종이로 만들어진 학원비 봉투.


그렇게 튼튼히 만들어진 죄 없는 봉투는

정태의 손에서 단번에 구겨지고 찢어지고 던져지고

엄마의 손에서 펴지고 테이프 덕지덕지 발라져 다시 책상 위에 올려졌다.


나에게서 어렵게라도 그 봉투를 채워 학원으로

다시 비워, 집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욕심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두 개의 네모칸 그 칸을 다 채우는 것이 나에게는 욕심이었고

나에게 욕심은 전달하지 않는 것이 책임이었다.


나에게 봉투는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