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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Nov 15. 2024

철 지난 바닷가

늦가을 바닷가 모래사장은 알 수 없는 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오직 한 종류인 그 풀들은  바짝 말라 갈색을 띠고 있었고 모래바닥에 바싹 붙어 옆으로 퍼져있었다. 아마 거센 바닷바람을 피해 생존하려고 그런 모양새로 자란 난 것 같았다. 무슨 풀일까. 바닷가에서 핀다는 해당화? 함초? 온 모래사장을 가득 메울 만큼 무성한 걸 보니 필시 귀한 풀은 아닐 테지. 그리고 여긴 분명 해수욕장인데 이렇게 촘촘하게 모래톱을 장악한 걸 보면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인기가 없는 해수욕장인가. 생각하며 바다를 찍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하늘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고 바람도 꽤 불었다. 음산한 날씨가 인적 없는 해변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더 운치 있게 다가왔다. 우연히 한 사람이 멀리서 앵글에 잡혔다. 쓸쓸하고 단조롭기만 한 풍경에 그 한 사람의 실루엣은 사진에 아연 생동감을 선사했다. 마침 여자분이다. 그렇지. 해변엔 여인이 제격이지.

연거푸 몇 번 셔트를 눌렀다. 너무 멀어서 누군지 알아 볼 수도 없고 더구나 뒷모습이니 실례가 되진 않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신 그분께 감사의 마음이 우러났다.


을 밟으며, 파도가 밀려와 모래톱과 만나는 곳까지 걸어갔다. 파도로 단단해진 모래톱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고 신발을 벗고 파도의 간지럽힘까지 느끼고 싶진 않았다. 어릴 땐 그렇게 바다에 가면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물에 몸을 담그기가 싫어졌다. 바닷가 도시에 살 적에도 가족들이 모두 바다에서 물장구를 쳐대도 홀로 해변 파라솔 밑에 꿋꿋이 안자 짐들만 지켰었다. 바다는 그저 바라볼 때 아름다운 것일 테니...


파도가 매끈하게 닦아놓은 모래 위를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부지런한 파도는 금세 내 발자국을 지우고 다시 말끔하게 모래를 정리했다. 마치 지나간 것은 잊으라는 듯 그렇게.


'파도를 만드는 것이 바다의 일이라면 당신을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라 했던가. 바다가 쉴  새 없이 파도를 만드는 것만큼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바람이 계속 불었다. 도무지 차갑지 않은 11월의 바람이.

힘든 기억 아픔까지도 짙은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부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저 끝 닿는 곳까지 걸어가면 파도가 다 싣고 가줄까.

바다에서 비우고 다시 얻은 힘으로 또 열심히 살아보라고 파도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약속할게. 철 지난 바다가 준 힘으로 더 씩씩하게 살아볼게.

저 모래사장의 이름 모르는 풀들처럼 옆으로 납작 누워서라도 단단히 붙들고 있어 볼게.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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