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태에 도착한 건, 개학을 며칠 앞둔 2월 중순이었다. 이제 개학을 하면 나는 연태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나는 대학원을 나온 것도 아니고 더구나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
내가 거기서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과 교편 잡은 경험이 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남편이 연태대학이랑 모종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어 중국에 누군가가 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가겠노라고 손을 번쩍 들었다. 도대체 무슨 용기였을까.
무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한 마디로 겁 없고 호기심 많은 내가 내린 결정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 자체였다.
나의 결정은 딸의 장래까지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멀쩡하게 고등학교 잘 다니던 애의 손을 잡아끌고 중국으로 날아갔으니까.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과연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거기다 또 한 가지. 연태대 쪽에서 나더러 한국어를 가르 칠 수 있냐고 했을 때, 할 수 있다고 주제 파악도 못하고 속 시원히 대답해 버렸으니 그때의 나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도착하자마자 한 권의 책이 주어졌다. 한국어 회화 책이었다.
그날부터 방에 틀여 박혀 그 책을 낱낱이 파헤쳤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대화 속엔 수많은 문법과 발음법칙이 숨겨져 있었다.
이 한국어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수업하여 집중시킬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국어는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한국사람이고 학교에서 국어를 공부했지만 막상 다시 파고 들어보니 나의 지식이라 참으로 보잘것없고 부끄러운 수준이란 걸 알게 되었다.
겁도 없이 가르칠 수 있다고 한 저 밑바닥엔, 어릴 때 좋은 선생님들로부터 제대로 문법을 배웠다는 자부심, 다른 과목보단 그래도 국어는 좀 했다는 자만심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절실히 깨달았다.
다행히 한국어와 깊이 친해지는 건 정말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그 당시 나의 모든 시간은 온통 공부와 수업준비에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내가 습득한 것을 다 학생들에게 전달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시긴도 없었다. 하지만 가르치진 않더라도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꾸준히 공부를 해 나갔다. 한국어는 어려웠다. 너무나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반면에 한글은 너무 쉬웠다. 모음 자음을 익히기만 하면 학생들은 책을 거침없이 읽어 내렸다. 비록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해도 읽는 데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 한국어. 세상에서 자장 쉬운 글. 한글. 그때 내가 한 생각이었다.
중국 학생들은 순박했다. 마치 내가 학교 다닐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여학생 중에 화장한 학생은 거의 없었고 옷차림도 수수하고 머리는 대부분 뒤로 질끈 묶었다. 수업에 임하는 자세며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 등 내가 알고 있는 학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였나 학생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이 솟아났다. 모두가 내 자식 같고 동생 같았다. 한국애들도 아니고 말도 세심하게는 통하지 않는 중국애들이 왜 그리도 사랑스러웠을까.
강단에 서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중국 이름이라 쉽지는 않았다. 대학이라 강의만 하면 그만이지 굳이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눈을 맞추며 부르고 싶었고 그게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더 끌어내고 친밀감을 높이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격차가 매우 컸다. 학생들의 실력을 면밀히 파악해 개개인의 수준에 맞는 질문을 던져 성취감을 느끼게 하려고 꽤나 신경을 썼다. 자기소개서는 흔히 학생들의 신상 파악과 작문 실력을 알기 위해 쓰게 하지만 나는 살짝 바꾸어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는 친구들의 얘기를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쓰게 했고 의외로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거기서 알게 된 학생들에 대한 정보는 개개인과의 대화의 소재로 적절히 활용되었다.
과목 배정은 학기마다 달라졌고 수업은 학년이 높을수록 수월했고 생동감이 있었다.
수업 전 날은 학생들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렜고 수업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2시간의 수업을 이어갔다. 애들도 불만이 없었고 화장실 갈 사람만 잠시 나갔다 올 뿐이었다. 어쩌다 공휴일과 겹쳐 결강이 되면 반드시 빈 시간을 틈 타 보강을 했다. 내 수업에 결강이란 있을 수 없었다.
수업 후엔 꼭 과제를 내주었고 과제 노트를 따로 만들어 자기가 한 걸 다 모아놓게 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애들이 뭐라고 썼을지 너무 궁금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과제물부터 살폈다. 그리고 틀린 문장과 표현, 글자 등을 하나하나 고쳐 주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고 행복했다. 그 시간을 떠올리면 행복하고 충만했다는 것 외엔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학생들과 수업하고 글 쓴 것 고쳐주며 뒤늦게 나의 진정한 적성을 찾아가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일이 재미있다는 말. 그 말의 의미를 알아갔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선생님은 엄마 같아요. 선생님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느껴져요. 그런 말은 언제나 나를 춤추게 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딸애가 북경 소재의 대학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함께 북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다섯 학기. 2년 반 만에 연태대학을 떠났다.
친구들은 요즘도 말한다. 연태에서 방학 때 나온 너는 반짝반짝 빛이 났어. 정말 좋아 보였고 생기가 넘쳤지.
북경으로 온 나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가슴이 벙 뚫리고 찬바람이 휙휙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날마다 학교와 학생들만 생각했다. 지금쯤 연태에서라면 뭘 하고 있을까. 이제 물이 올라 진짜 잘 가르칠 수 있는데... 마음은 온통 연태대학에 다 가 있었다. 혼자 길을 걸으면 주책없이 눈물이 나기도 해서 이러다 우울증 걸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증상은 거의 1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나는 미지근한 사람이다. 매사에 크게 의욕도 없고 별로 욕심도 없고 사람에게도 종교에도 푹 빠져 본 일이 없다.
그런 내가 난생처음 열정이 솟구쳐 중국애들 가르치는데 몰두했다. 내 마음과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았다.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삭막했을까.
그래서 감사하다. 나의 열정을 끓어 내 준 그 학교와 그 학생들이 참으로 감사하다. 이제는 모두 결혼도 하고 훌륭한 어른들이 되어 있겠지. 우배배, 양명규, 신빙결, 왕숙군, 초평평... 모두 잘 있는 거지?
가끔은, 아주 가끔 대학시절을 떠올릴 때면 한 번쯤 나도 떠올려 주지 않겠니? 보고 싶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