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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04. 2023

영화 이야기 <플라워 킬링 문>

이 영화의 원제는 <킬러즈 오브 더 플라워 문>이다. 한국어라면 모를까 굳이 영어 제목을 바꾼 이유는 알 수 없다. 추측컨대 원작에서 가져온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그렌이 쓴 논픽션 <플라워 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원작과 무관하다는 말이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원작을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영화는 원작의 유무와 상관없이 독립적인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플라워 킬링 문>은 말해주지 못하지만 <킬러즈 오브 더 플라워 문>은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지금부터 그 말을 들어보려 한다.


플라워 문은 직역하면 꽃달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에 꽃달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꽃과 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온다. 먼저 달은 오세이지 족 신화에 따르면 어머니를 상징하는 말이다. 버크하트가 헤일로부터 받은 오세이지 족 역사서에는 태양은 할아버지, 불은 아버지 그리고 달은 어머니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꽃에 대한 이야기는 말이 아니라 장면으로 나온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소수민족들은 각각의 전통의상을 입고 군무를 추는데 이 군무가 형상화하는 모양이 바로 꽃이다. 그러니 꽃은 소수민족이고 달은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플라워 문이란 바로 소수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이 된다.


소수민족의 어머니란 누구를 말하는가. 일단은 소수민족을 낳은 여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소수민족이란 어렵게 말하면 독립적인 전통과 위태로운 자생력이 공존하는 집단을 말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백인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이 영화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을 낳는 여자는 하나뿐이다. 바로 백인과 결혼한 오세이지 족 여자들. 그녀들은 인디언과 결혼해도 백인과 결혼해도 모두 백인이 아닌 자를 낳는다. 말하자면 플라워 문이란 백인과 결혼한 인디언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킬러즈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미니는 병사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아픈 것을 알면서도 전혀 아내를 돌보지 않은 남편 빌 스미스에게 책임이 있다. 애니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은 유사 남편의 지위를 차지한 바이런이었고 몰리를 살해하기 위해 인슐린에 독약을 섞은 것은 남편 버크하트였다. 즉 플라워 문의 킬러즈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들이다. 그러니 <킬러즈 오브 더 플라워 문>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가족이면서 동시에 가족 해체를 상징하는 명명이다.


남편이 돈을 차지하기 위해 아내를 살해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사례지만 가족의 해체는 그것만이 아니다. 몰리와 버크하트가 결혼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몰리는 인디언 여성이고 버크하트는 백인 남성이다.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순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인디언에게 이방인과의 결합은 금기에 가깝다. 그러나 몰리는 이 금기는 단지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그녀의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몰리의 네 자매가 극 초반에 백인 남성들을 보면서 성적 매력을 비교하는 장면은 여성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인디언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몰리는 어머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크하트의 외모, 즉 성적 매력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이것은 인디언의 가족 문화가 아니다.


백인의 가족 문화 역시 부서지기는 마찬가지다. 헤일은 버크하트의 삼촌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보다는 보스와 조직원의 관계에 가깝다. 헤일은 버크하트에게 몰리와 결혼하는 ‘사업’을 제안하고 리타와 빌 스미스 살해를 종용하며 몰리의 살해까지 지시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갇힐 것까지 요구한다. 이것은 공동체로서의 가족이 아닌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실제로는 구성원을 도구로 이용하는 ‘마피아적 패밀리’에 가깝다. 백인 남편들이 인디언 여자를 아내로 맞은 뒤 살해하여 재산을 강탈하는 것도 구조상으로 본다면 인디언 여성을 아내가 아닌 조직원으로 편입시킨 뒤 이용하고 폐기하는 방식이다. 기존 가족의 파괴는 인디언뿐만 아니라 백인들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이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해체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몰리가 가진 거라곤 얼굴뿐인 버크하트를 남편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몰리에게 충분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일이 바이런과 버크하트를 몰리 자매에게 접근시키는 것도 그들이 가진 돈 때문이고 버크하트가 처제인 리타를 살해하고 아내인 몰리까지 죽이려고 하는 것 역시 돈 때문이다. 가족보다 돈이 우선인 관념, 아니 세상 무엇보다 돈이 우선인 관념을 일컬어 자본주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단은 인디언이든 백인이든 양편의 가족 관념을 해체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도 돈 때문에 존속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모두가 돈 때문에 가족을 죽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헤일 가족만 특별히 타락한 인간들인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배경인 그레이홀스의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밀주를 담그고 살인을 저지르며 의사는 돈을 받고 독약을 처방하고 장의사는 장례비를 속인다. 특히 가격을 속인 것을 따지는 버크하트에게 장의사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한데 그는 인디언이 노력 없이 많은 재산을 얻었다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가격을 속이는 자신의 행위는 “뿌린대로 거두”는 성경 말씀에 비유하고 있다. 그레이홀스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은 노동으로 격상된다.


이렇듯 백인들은 돈을 갖기 위해 사기와 절도, 살인까지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스스로의 내면에서 정당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들이라고 사기나 절도, 살인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한해 사기와 절도, 살인은 정당해진다. 그것은 바로 대상이 인디언인 경우에 그렇다. 살인 청부를 거절하던 남자가 대상이 인디언이라는 말을 듣고 “그럼 얘기가 다르지”라고 태도를 바꾸는 것은 결코 그만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인디언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발로 차는 게 더 기소당할 확률이 높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통념인 것이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인디언은 죽여도 되는가. 인디언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백인들이 규정한 ‘인간’의 정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규정한 인간이란 당연히 백인을 말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죽거나 이용당하는 것은 인디언만이 아니다. 빌 스미스는 살해당했고 버크하트는 재산권 이양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고 나아가 법정에서의 침묵을 강요당한다. 또한 살인을 저지르는 청부업자들은 범죄자이거나 가난한 집의 가장이며 이들은 나중에 살해당하거나 체포된다. 요컨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것은 인디언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잔혹한 살인 사건은 백인이라는 주류 민족이 인디언이라는 소수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 차별처럼 보이지만 이 차별은 민족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것이다. 비평가 황종연은 <탕아를 위한 비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휴머니즘 교육 및 교양은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인간 문화에 인간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통제된 해석에 기초한 일정한 차별의 구조 속에서 인간화를 인식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으로 말미암아 계급적 차별을 당하지 않는 ‘보편적 인간’이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세계에는 인간의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백인이 생각하는 인간의 자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피부색이나 사회적 지위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붉은 피부를 가진 인디언은 죽여도 되고, 흰 피부를 가지고 있어도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갖지 못한 백인은 이용해도 된다. 영화 속에서 스스로 인간의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헤일이다. 인간의 자격을 갖춘 자는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우월하므로 그는 그레이홀스의 ‘킹’으로 군림한다. 왕과 인간의 시대는 사라지고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들의 시대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이 아닌 자들의 왕이다.


그렇다면 헤일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는 왕족 출신도 아니고 재산을 상속받거나 후원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목장 일꾼 출신인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왕으로 거듭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오세이지 족의 석유로 인한 백인 이주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래 이 땅은 오세이지 족 그러니까 영토를 갖지 못해 쫓기고 쫓긴 자들이 마지막에야 허락받은 척박한 땅이었다. 짐승이 아니고서는 방문하지 않을 땅에 백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석유가 발견된 다음이다. 인간이 아닌 자들의 땅에서 솟아오른 석유는 인간의 유입을 이끌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곳을 찾는다. 말하자면 석유는 인간다움의 재료인 것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석유가 필요하다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실재의 반영이기도 하다. 있느 것이라고는 인디언과 짐승뿐이었던 그레이홀스가 번영을 구가하게 된 것은 석유 때문이니까. 석유를 채굴하기 위해 백인들은 이곳에 공장을 지었다. 근로자들이 거주하기 위한 집과 술집, 클럽 같은 편의시설도 만들었고 월급을 저축하거나 송금하기 위한 은행과 사고 대비를 위한 보험사도 설립했다. 유통비 절감을 위해 철도를 개설했으며 이동성이 증가하자 사람들이 몰려와 가족을 이루기 시작했다. 학교와 교회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하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석유가 인간의 자격이라는 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들, 회사와 은행과 학교가 반드시 삶을 양성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적확하게 말하면 이 조건들이 양성하는 것은 전인류의 삶이 아니라 백인의 삶이다. 학교에서는 인디언의 말을 가르치지 않고 교회에서는 달이 어머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백인들이 구축한 조건들은 그들의 문화를 재생산하고 확산함으로써 삶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반대로 인디언들로부터는 삶의 양식을 빼앗는다. 백인들은 미개한 원주민에게 인간의 교양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재로 영어를 배우고 예수를 믿으면서 인디언이 되어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2등 미국인이다. 마치 함부로 지어진 그들의 이름처럼 인디언은 백인과의 접촉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어간다.


백인들이 학교와 교회를 짓고 인디언을 그들의 문화로 유입하는 이유는 인디언이 가진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백인들은 인디언으로부터 석유를 훔치거나 강탈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장을 짓고 은행을 만들어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당한 방법으로 석유를 매입한다. 만약 백인들이 인디언으로부터 석유를 훔쳤다면 인디언은 죽었을지언정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과의 거래를 통해 그들은 원래 자기 자신이 아닌 2등 미국인이 되어간다. 그러니 그들이 팔고 있는 것은 석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타자화하고 백인의 문화를 주체화하는 과정은 석유 거래를 통해 진행된다. 즉 문화의 유입과 폐기는 시장에서 이뤄지는 셈이다. 새로운 문화가 폭력과 개발, 이민과 결합을 통해 기존 문화를 내쫓고 시장을 건설하는 행위를 식민 경영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인디언들은 죽어도 수사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폭력 속에 방치되어 있다. 석유를 채굴하고 상품화하기 위한 각종 인프라가 세워졌고 그로 인해 대량의 백인이 유입되어 인디언과 결혼하는 문화가 발생하였으니 그레이홀스는 갈 데 없는 식민지이며 그곳의 왕인 헤일은 곧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자인 셈이다. 헤일은 낮에는 학교와 은행을 지어주고 밤에는 인디언을 죽인다. 신사복을 입은 살인자. 제국주의자란 곧 마피아라고 마틴 스콜세지는 말한다.


제국주의자가 식민지를 경영하는 이유는 하나로 콕 집을 수 없지만 경제적인 이유를 빼놓고 말할 수도 없다. 영화의 배경으로부터 몇 년 뒤면 일어날 대공황의 결정적인 원인은 디플레이션이었다. 대량 생산된 상품을 팔아줄 시장이 없어서 돈의 흐름이 멎었고 대량 해고가 발생했다. 해고된 자들은 곧 소비자들이었으므로 시장은 더욱 위축되었고 이 구조가 반복되면서 미국 경제가 파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를 경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곳에 시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시장은 얼핏 보기에 돈만 있으면 어떤 물건이든 구할 수 있으므로 인간과 물건의 거리를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장만큼 인간과 물건 사이를 떨어뜨려놓는 것도 없다. 가령 인디언들은 그들이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의 재료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었고 그 재료를 가공하는 것은 인간이었으므로 인간과 물건의 거리는 가까웠다. 하지만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이 거리는 분절된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돈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인디언의 손에 들어온다.


그레이홀스 지하에 묻힌 석유를 공장에서 채굴하고 회사는 채굴한 석유를 상품화하며 철도는 유통하고 은행은 환전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환전된 돈은 위탁회사에서 관리하게 되고 인디언들은 자신의 석유를 팔아서 얻은 돈을 위탁회사의 승인을 받은 후 사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디언은 필요한 것을 자연에서 바로 구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공장과 회사, 철도와 은행 그리고 위탁사를 거친 후에야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이 인간과 물건 사이에 만든 이 거리는 그러나 돈이라는 교환 매개물에 의해 은폐된다. 돈을 가지고만 있으면 저 거리는 마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음식이든 의복이든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은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에서 재료를 채집하고 물건을 가공하던 시절에 인간이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등장으로 인간은 그 자리를 돈에게 내주게 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은 생존을 위한 지위를 돈에게 넘겨준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보다 돈이므로 당연히 돈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인디언은 물론이고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백인들이 도구로 사용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그들은 돈을 통제하는 인간이 아니라 돈에 통제되는 인간이다. 반대로 헤일이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석유와 부동산을 통해 돈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식민지 시장에서 인간의 자격이란 다름 아닌 돈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공동체적 가족이 마피아적 패밀리로 전환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가족이란 혈연 공동체로서의 의미 이전에 생존 수단으로 탄생했다. 생존 수단이 인간이 아닌 돈으로 바뀐 이상 가족은 최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관계로 재편된다. 그것은 인디언과 결혼한 백인들이나 헤일의 가족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로서의 가족이다. 인간은 피로 움직이지만 도구는 석유로 작동한다. 그레이홀스의 가족들은 여전히 혈연공동체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니라 검은 피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재산을 위해 아내마저 죽이려던 버크하트가 막내딸의 죽음 이후 헤일과 등을 지는 모습은 마피아적 패밀리에서 공동체적 가족으로 다시 가족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빌이나 바이런과 달리 버크하트는 몰리를 죽여야 할 타겟만이 아니라 아내로도 생각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성향은 헤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결함이나 역설적이게도 이 결함은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는 식민지 시장 속에서는 채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징후로 발견된다. 전자의 인간이 시장의 인간이라면 후자의 인간은 자연의 인간이다. 시장은 이성이 만들고 자연은 동물이 만든다. 이성이 인간을 교환품으로 사용할 때 동물로서의 인간은 오히려 윤리적일 수 있다. 이 동물로서의 인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신사복을 입은 살인자들이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기 목장에 불을 지른 헤일을 보면서 몰리에게 주사하려던 독약의 일부를 마시는 버크하트의 모습은 바로 이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윤리성의 발현이다. 고흐의 그림 같이 불타는 들판 위에서 서로를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는 광경을 보면서 버크하트는 오세이지 족의 신화를 떠올렸을 것이다. 오세이지 족 신화에서 아버지는 불이다. 플라워 문은 소수민족을 낳고 지키지만 플라워 파이어는 소수민족을 낳고 죽인다. 아버지가 어미와 자식을 죽이는 이 광기는 자연의 것이 아니다. 살인은 충동적인 것일지 몰라도 학살은 이성적인 것이다. 이 이성적인 세계에서 자연성을 가진 인간은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버크하트가 극약을 마시는 것은 그래서이다. 해독할 수 없는 독은 독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버크하트는 극약을 전부 마신 게 아니라 일부만 마셨다. 남은 극약은 계획대로 몰리의 몸 속에 주사했다. 극약을 삼키는 그의 행동이 죄책감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이 죄책감은 아직 죽지 않은 아내를 살리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단지 몰리와 극약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고통을 나누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버크하트의 행동은 타인과 고통을 나눈다는 점에서는 선이지만 이 나눔이 타인의 고통이 아닌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위선이다. 그는 막내딸의 죽음 이후 헤일과 등을 돌림으로써 마피아적 패밀리 대신 공동체적 가족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선택한 것이 진정 가족인지 아니면 헤일의 부하로서 얻는 이익과 몰리의 남편으로서 얻는 이익을 저울질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이 의심은 더욱 증폭된다.


헤일을 고발하는 증언을 마치고 버크하트는 몰리와 둘만 남는다. 모든 것을 다 말했느냐는 몰리의 질문에 버크하트는 더 이상 숨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몰리의 표정은 그 순간 싸늘해진다. 법정에서 동생인 리타와 그 남편인 빌 스미스의 살해를 청부했음을 고백할 때 몰리는 미소 짓고 있었다. 몰리에게는 동생의 죽음보다 남편의 회개가 더 반가웠던 것이다. 하지만 버크하트는 극약을 다 마시지 않은 것처럼 진실도 다 말하지 않는다. 그는 몰리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버크하트의 말을 듣는 순간 몰리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몰리는 느낀 것이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고백은 참회의 표현이 아니라 계산의 결과이다.


헤일이 악당이라면 버크하트에게 가장 적합한 말은 위선자다. 그가 법정에서 몰리 살해 시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본인에게 불리한 말을 함으로써 추가 기소를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원이라는 제도 하에서 인간이 저지른 죄는 ‘계산’된다. 죄는 저울의 추처럼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형량이 정해지고 그 형량의 덧셈과 뺄셈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징벌은 ‘산출’된다. 버크하트는 몰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더 이상 감추는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때 그가 말한 감추는 것이 없는 인간이란 죄가 없는 영혼이 아니라 기소될 만큼의 죄를 짓지 않은 인간 혹은 기소될 만큼의 죄를 덜어낸 인간이다. 몰리는 이러한 계산된 죄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죄 지은 자와 참회한 자 둘뿐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가족과 구분되는 마피아적 패밀리의 특징은 패밀리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을 소모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익을 산출하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릴 때 구성원은 계산기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계산기 속 숫자로 치환된다. 죄 역시 마찬가지다. 구약에서 죄는 같은 죄로 징벌하는 것(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었고 신약에서 죄는 용서하는 것(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내주어라)이었다. 말하자면 죄는 징벌이나 용서함으로써 소멸할 뿐 계산되는 게 아니었으므로 가톨릭 신자인 몰리에게는 버크하트를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두 가지 길만 남아 있었다. 용서한다는 선택지 외에 모든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므로 중간은 없다. 그러나 버크하트가 선택한 것은 중간이었다. 그는 신을 대신해서 물은 몰리에게 인간의 방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니 버크하트는 아무리 공동체적 가족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마피아적 패밀리의 인간이다. 헤일이 겉으로 정장을 입고 속으로 사람을 죽이는 마피아라면, 버크하트는 겉으로 휴머니즘의 옷을 입고 있어도 내부는 마피아인 위선자인 것이다. 마피아와 위선자는 모두 광기가 아닌 이성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성이라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는 오만일지도 모른다. 처음 그레이홀스에 도착했을 무렵 어리숙한 청년이었던 버크하트는 최후의 순간에 오만했다. 그는 “다음은 당신 차례”라는 몰리의 말을 듣고도 그녀가 모를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성은 분명 신을 죽였다. 그러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죽이지 못했다. 그것이 버크하트의 패인이다.



2023년 10월 21일부터 2023년 11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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