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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젤 Jul 11. 2022

양가감정의 쳇바퀴에 갇혀 있다

양육자에게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란

 나는 싸움을 싫어한다. 물론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나는 그 정도가 심한 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타인과 싸우는 게 정말 싫었다. 심지어 합법적인 말싸움의 장인 논쟁에서도 그랬다. 누군가는 논쟁에서 상대를 자신의 논리로 꺾어내는 걸 좋아했지만 나는 그게 어려웠다. 누군가와 대립하기보다 그 사람에게 의견을 맞추거나, 혹은 그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 내 갈등 처리 방식이었다.


 회피라는 갈등 해결 방식을 버리고 내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쯤이었다. 살던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동네로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거기다가 중학생 때까지 계속 하던 성가대가 아닌, 찬양팀이라는 색다른 환경을 선택했다. 새로운 환경들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내 목소리를 명확히 해야 했다. 일면식도 없는 애들에게 내 의견을 주장하는 건 쉬웠다. 그렇게 조금씩 나는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자기주장이 생기면서 독립심과 반항심도 함께 길러졌다. '내' 말을 시작하게 되면서 '내' 마음을 지각하게 된 탓일지 모른다. 부모님은 대학생이 된 내게 집안의 맏이이자 딸로서 집안일에 동참하기를 바라셨다. 20대 초반에는 그걸로 부모님과 다퉜다. 아르바이트, 학교생활 등으로 바쁜 내게 집안일을 하고 아버지의 끼니를 챙기라는 것 자체가 짜증났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생기는 부모님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더이상 부딪치기 싫은 마음 등이 합쳐져서 어느 정도 집안일에 참여했다.


 사건이 터진 건 2주일 전이었다. 동생과 싸우던 어머니의 불똥이 내게 튄 것이다. 순식간에 나는 집안일도 하지 않으면서 버릇없이 부모님을 대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너희 얼굴도 보기 싫으니 집을 나가라 종용했다.


 나는 집을 나가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주워 듣기도 했고, 부모님들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걸 듣기도 했다. 거진 여름마다 그런 말을 들었고 실제로 대학교 2학년 때는 잠시 친구 집에 있기도 했다. 매년 반복되는 나가라는 말이 지겨웠다. 어이가 없기도 했다. 너네가 거주하는 이 집이 누구 껀지 기억하지? 알아서 잘 해라. 그런 말처럼 느껴져 더 그랬다.


 '여름의 저주'. 나는 매 여름마다 피터지게 싸우는 우리 집에 여름의 저주가 걸렸다고 표현했다. 감정의 골은 매 여름마다 깊어졌다가 자취를 감췄다. 올해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애초에 이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 편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싸운 당일과 그 다다음날까지 계속해서 카카오톡으로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언제 나갈 거냐, 너희 얼굴도 보기 싫다 등. 언어를 순화해서 이 정도지, 실제로는 내가 어머니 돈을 떼먹고 도망이라도 쳤나 싶을 정도로 강한 단어들이 가득했다. 신입 교육을 들으면서 기가 찼다. 내가 어떤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환자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차원이 달랐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게 언제 나갈 거냐 물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 그 쯤 되니 애써 무시하고자 했던 나조차도 어머니가 진심으로 나를 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았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다. 나는 자다 일어나서 얻어맞은 것밖에 죄가 없는데-뭐,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동안 칼을 갈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큰 죄라서 나가라고 하시나. 애초에 6월달에 병원 주변에서 자취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을 때 그걸 강력히 막은 건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쫓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뵙는 게 여러 감정이 들었다.


 내가 집에 언제 들어오는지 항상 전화했던, 독립은 결혼하고서 하는 거라며 자신과 살기를 권유했던, 독립 대신 자차를 사줄 테니 집에서 다니라고 얘기하던 --- 그런 사람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니 참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어머니에 대한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녁을 차려줬을 때 조금 투덜댔다는 이유로 나는 부모 취급도 안하는 나쁜 년이 됐다. 동생을 생각 없이 나쁜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둔 언니가 됐으며, 빨리 집에서 내쫓아야 할 대상취급받는 게 화가 났다. 차라리 내가 정말 패륜아처럼 굴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이왕이면 부모님 집에서 돈 아끼며 편하게 다니자, 생각했던 나는 자취를 결심했다. 결심하니 다음 일은 척척 진행됐다. 병원 근처의 매물을 알아봤고 집을 보러 다녔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보증금을 마련했고 집주인과 흥정까지 해서 월세를 깎았다. 결국 계약까지 성공했고 이사 날짜가 정해졌다. 내가 집을 구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어머니와 나는 냉전을 유지했다.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는 예수님처럼 나를 미워하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인(聖人)이었고 나는 인간이었다. 본격적으로 고등학생 때 자기 주장이 생기고 대학생 때 여러 사람을 겪으면서, 나는 '나를 싫어하는 상대를 굳이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를 깨달았다. 그 후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마음을 접었다. 너 나 싫어해? 오케이. 바이. 아예 나와 다른 타인을 삶에서 잘라내는 건 쉬웠다.


 하지만 나와 피가 이어져 있는, 내 최초의 양육자이자 보호자였던 사람에게 미움과 무시를 받는 일은 어려웠다. 지금껏 만났던 얄팍한 인연들처럼 안 맞는구나- 생각하고 무시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양가감정을 느꼈다. 어머니가 참 밉고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한편으로 이해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일말의 희망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그 때는 내가 심했던 것 같다, 라는 말 한 마디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새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너희에게 투영한 것 같다, 이런 얘기라도 들으면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그러면, 덜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를 미워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사랑한다.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감정들이 후두둑 떨어지며 발 아래로 커다란 공허를 그린다.




 이사까지는 대략 3주가 남았다. 아직 부모님께는 집 계약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여전히 대면대면하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나는 집에서 주로 내 방에 있다. 어머니는 거실에 있다. 나는 내 방의 문을 닫는다. 한 모금의 공기라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하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내가 정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리면, 내가 이사를 할 수밖에 없음을 알린다면 어머니 당신께서는 내게 뭐라고 말할까? 당신은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나가서 후련하다고 할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어머니와 집에 있는 게 숨막혀서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양가감정이라는 쳇바퀴를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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