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패러디
"지금 마음이 어떤가요?" 예전에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깊게 기억한 질문이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의 내용은 그거였다.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않고 그저 그 아픈 마음을 공감하며 들어주라는 것. 그리고 내가 만약 저 질문을 받는다 가정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지금 저는 적당히 우울합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우울증의 진단 기중 중 하나는 우울한 기분을 하루 중 대부분, 2주 이상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에게 이런 일은 드물지 않다. 몇 년 전에도 병원에서 태움당해 우울증을 얻어 약의 신세를 져본 적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증상은 호전되어 지금은 약을 끊었지만 우울은 20대 초반에 만난 내 동반자와 비슷한 녀석이다. 경련을 자주 경험하시는 분들은 종종 경련 시작될 것 같은 조짐을 느끼실 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근래같이 축 가라앉은 기분에 맥을 못 추는 나를 보며 아, 이 우울증이 또 도졌구나 싶은 생각이 팍팍 들었다.
근래 나는 정말로 우울하다. 내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과음이나 흡연같이 내 삶을 파괴할 수 있는 파괴적인 일을 하고 싶은 물론, 외모부터 성격 하나하나 맘에 드는 게 없어 내 인생을 아예 리셋하고 싶은 정도이다. 그러나 겉으로 봤을 때 내 인생은 그닥 나쁘지 않다. 어쨌건 나름 이름 있는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적당히 연애도 한 걸 보면 외모가 못봐줄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당장 휴대폰을 켜고 고민 상담을 할 수 있는 친구도 몇 명 있는데다 전 병동 동기들과 친한 걸 보면, 성격이 개차반인 편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내 우울의 트리거는 어디서 찾아왔을까. 나 스스로도 답을 찾고 싶어서 최근 내 인생에 찾아온 주요한 몇 가지 변화를 꼽아 봤다.
1) 병동 로테이션(부서가 바뀌는 것) 당함
2) 미국간호사 면허 시험 말아먹은 것 같음
이 두 가지가 정말 내 우울의 원인인가.
1)에 관하여.
최근 들어 로테이션(부서가 바뀌는 것)을 당했다. 내가 신청한 것도 아니다. 말단 조직원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위에서 가라고 하니 갔다. 1, 2인실 위주의 잡과 병동에서 이제 나도 한 과만을 보는 병동으로 배치가 됐다. 그 덕분에 정규 시간 이외에도 교육을 몇 가지 들어야만 했다. 이 병동에서 이뤄지고 있는 의료 행위들과 그에 따른 간호 술기들 및 간호사가 챙겨야 할 서류 등을 알아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 배치된 병동의 환자들은 나도 몇 번 본 적 있는 수술을 하고 온 사람들이고, 내가 아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괜찮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만이었을까? 새로 배치받은 부서 업무는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달랐다.
이전 병동에서는 하지 않았던 업무들을 알아야 했고, 받지 않았던 서류들을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인계장 정리도 너무 많이 달랐다. 업무를 배울 수 있는 기간은 5일밖에 주지 않는데 그 사이에 모든 걸 적응해서 이 병동의 간호사로 일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다.
그와중에 새로 만난 부서원들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트레이닝 기간에 생전 보지 못한 서류를 받던 나에게 "선생님, 똑바로 안 해요?" 라는 말을 서슴치 않는 건 물론이고 "전 병동은 어떻게 했길래 이걸 몰라요?" 라는 말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들었다. 심지어 머리 모양이 왜 그러냐, 머리 제대로 넘겨서 삔으로 고정해라. 주머니 속에 물품들 다 치워라. 라는 말도 들었고 사람들이 다 있는 데에서 "공부 제대로 해 와요. 그렇게 공부 안 해서 일 하겠어?"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로테이션 온 사람을 썩 좋지 않게 보는 건 모든 병원이 그렇다고들 하지만, 많이 당황했다.
병동에 나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이미 자기들끼리 친해져 있는 마당에 내가 비집고 갈 틈구석은 없어 보였고, 같은 사번으로 입사한 동기들이 있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 사람들은 외려 나에게 "선생님, 물건 제대로 카운트 안 하셨는데요. 이거 제가 카운트 하는 건데 왜 선생님께서 하셨어요. 다른 거 해주세요." 라며 정확한 업무를 알려주는데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음.... 정말 일하기 싫어지더라. 내 스스로가 어디 가서 그렇게 욕먹을 짓은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선 내가 기록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회자가 됐다.
2)에 관하여.
모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점차 떨어지는 내 직업의 위상을 견디기 힘들고 조금 더 넓은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 간호사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을 준비했다. 기출문제 강의를 많이 듣던데, 나는 앱을 결제해 문제풀이를 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한 1~2개월 빠짝 준비하고 시험을 보러 갔다. 4월 15일에 시험을 봤는데 시험 결과는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나오면서 기분이 그랬다. 이건 100% 불합격일 것이라고. 심지어 시험 종료 후 Good 팝업과 Bad 팝업을 확인하는 트릭을 써서 시험 합/불 결과를 미리 확인하시곤 하던데, 내 결과는 Bad 팝업이었다. 뭐 한 90~99% 확률로 시험 불합격이란 소리였다.
솔직히 (1)을 겪고 너무 사람들에게 질려서 (2)를 합격하면 어느 정도 근속 일수만 채우고 바로 사직을 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2)를 겪으니 내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고 지금 일하는 병동에서도 제대로 적응 못 하는 주제에 사직은 무슨 사직일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1)을 겪고 2)까지 겪고 나니 정말 인생 되는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타는 고사하고 우울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 우울한 상태다. 우울하니 세상 모든 게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게 느껴진다. 작년 가을에 만난 남자친구는 여전히 날 참 사랑해주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종종 이 친구가 하는 말에 정말 빈정이 상한다. 출근할 때면 오늘은 어떤 걸로 시비가 털릴까 기대가 되고(반어법이다.) 휴무일 때는 혼자 집에 있는 게 너무 우울해서 뭘 해야 할까 인터넷을 뒤지지만 딱히 할 게 없다.
사람 많은 곳 싫어하는 남자친구와 내가 합쳐져 데이트를 할 때는 종종 의도치 않게 집에서 데이트를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면 남자친구는 게임을 하고 나는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하곤 한다. 분명 서로 각자 할 일을 하기로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종종 게임을 하는 그 뒷모습이 참 얄밉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다가 또 그래, 쟤도 일주일 간 직장에서 데이고 데였으니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기분 변화의 끝판왕이다. mood swing이라는 영어 단어가 참 내 기분을 잘 설명하는 것 같다. 그네를 타는 것 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기분.
이제는 내 외모도, 내 성격도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 체격에 누가 봐도 건강미 넘친다-다른 말로 하면 거대하고 여리여리하지 않단 소리겠지-, 운동 좀 했냐는 말을 듣는 이 체격도 싫고 여성스럽게 예쁘지 않은 외모도 짜증난다. 유중혁도 아니고 쉽사리 우울해지는 이 개복치 멘탈과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다가가지 못하는 이 성격도 환멸이 난다. 그렇게 살다간 지금 있는 병동에서 아무랑도 못 친해질 텐데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싶지만서도.
우울하다. 그래. 솔직히 정말로 우울하다. 그치만 곧 나이트 출근은 해야 한다. 어쨌건 먹여 살려야 할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직장인의 무게이지 않을까? 어쩔 수 없지.
우울함이라는 녀석을 떨쳐내는게 쉽지 않다면, 이 녀석과 공존하는 삶을 살고 싶다.
가끔 우울함이 찾아와도 그래, 너 또 왔구나? 하면서 열받지 않고 부드러이 넘길 수 있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