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드니까 그렇겠지
작년 겨울, 병동 동기 두 명과 밖에서 만나 놀고 있을 때였다. 고기로 배를 채운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위해 카페에 갔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을 열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하나 남은 빈 4인 좌석을 발견한 우리는 재빨리 그 자리에 앉았고, 속전속결로 메뉴를 골라 한 명에게 주문을 부탁한 뒤 음료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음료를 기다리며 내가 다 지워진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을 동안, 갑자기 맞은편에 앉은 동기 한 명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약봉지를 꺼냈다. 약 주제에 색깔이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웠다. "뭐예요, 쌤 요새 어디 아파요?" 장난으로 던진 내 말에 돌아오는 건 묵직한 대답이었다.
"아, 네. 저 공황이 좀 생겨서… 10월부터 약 먹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담담하게 약을 입에 털어 넣는 동기의 모습. 이게 무슨 소리야, 물음표가 백만 개 띄워진 얼굴을 한 나를 보지 못한 동기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동기가 약을 목구멍으로 넘긴 그 순간, 나는 기다렸다는 듯 심문을 시작했다.
"약 언제부터 먹었어요? 나한테는 그런 얘기 없었던 것 같은데!"
"말씀드려야지 했는데, 우리가 근무가 겹치는 날이 많이 없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리고 약 먹는 거 쌤이 알게 되면 걱정 엄청 하실 것 같아서."
"아니, 그건 그래도… 원인은 뭐래요? 상담은 좀 받아요?"
"네. 상담은 11월부터 시작했어요. 원래는 그냥 약만 먹으려 했었는데, 11월에 발작이 한 번 있었거든요. 정신과로 약 타러 가는 길에 호흡이 안되고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껴서… 그때 이후로 상담은 다니고 있어요."
병원에 입사한 후 6월부터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거기다가 공황장애 약까지 얹힌 거죠 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동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 모습에서 작년 4월의 내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한창 우울해서 우울증 약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있었다.
나는 2021년 2월에 한 상급종합병원에 입사했다가 2달 만에 퇴사한 경험이 있다. 사유는 간단했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병원에 치이다가 우울증이 생겼고 우울은 나를 갉아먹었다. 사람과의 소통이 힘들었고 문자를 읽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살기 위해 병원을 그만두고 약을 먹기 시작했었다.
약을 먹으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생각보다 간호사들이 정신과 약을 참 많이 먹는다는 거였다. 대학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병동엔 그런 사람 없는데."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거의 모든 병동의 간호사들이 우울과 불면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회복을 돕기 위해 본인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꽤 아이러니했다.
언젠가 친한 대학 동기와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애가 입사한 지 6개월 차, 한창 힘들어할 무렵이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이 말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다 힘들어.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모든 게 힘들어.
일을 해 보니 동기의 그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간호사는 정말... 복합적으로 힘든 직업이었다. 환자, 보호자는 물론이고 병원 동료들마저 모셔야 하는 직업이었다.
환자, 보호자들은 국이 조금만 짜도 나에게 화를 냈다. 담당 환자가 많이 기다리는 탓에 검사실에 환자의 검사 예정 시간을 물으면 짜증을 들었다. 혈압이 높아 의사에게 이야기를 하면 저희도 환자 보고 있는데요.라는 싸늘한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병동 선생님들은 내가 한 실수는 대역죄고 그들이 한 실수는 사소한 해프닝으로 치부했다.
참 어려웠다. 나는 내게 배정된 환자 12~13명(+α) 뿐만 아니라 보호자들, 그 환자와 관련된 의료진들까지 합해 수십 명을 모셔야 하는데 정작 그들 중 나를 사람으로 제대로 대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리고, 나는 분명 한 명인데 내가 책임질 일은 이렇게 많다는 게.
이런 환경에서 버티다 못해 우울증이 생긴 사람들은 약을 먹으며 계속해서 근무한다.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운 이들은 결국 사직한다. 자신이 그렇게 들어오고 싶었던 병원임에도, 여러 시험과 면접을 거쳤음에도 퇴사를 선택한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일할 만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 약을 안 먹어도 일할 수 있는, 그런 살만한 환경이었으면 좋겠다.
올해 3월 경, 간호사로 일하는 다른 친구는 병원을 찾았다. 친구는 인계를 줄 때마다 심한 부담감을 느꼈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등의 증상을 호소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친구는 당시 매일매일을 힘들어했다. 내가 뭐 안 하고 간 게 없을까?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친구는 매일같이 그 말들을 중얼거리곤 했다. 마치 뭐에 씐 사람처럼.
나는 이직에 성공해 7월부로 새 병원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7월에 발령받은 친구들은 18명이었다. 그중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25일까지 아직 병원에 남은 친구는 13명이다. 채 2달도 채우지 못하고 5명의 신규 간호사가 사직을 선택했다. 사직한 신규 간호사 중 한 명의 SNS에는 매일같이 이런 내용이 올라오곤 했다. 힘들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자신이 싫다. 매일같이 우는 것도 지친다. 병원에 가는 게 너무나도 무섭다.
간호사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영영 오지 않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던 동기가 사직해서 더더욱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