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저항과 책의 존엄

by 윤재


책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생생한 꿈처럼 살아 숨 쉬는 순간이 있어요”

- 영화 더 북숍(The bookshop, 2017)의 주인공 플로렌스,




11.png


1959년 책을 사랑하는 미망인 플로렌스 그린(에밀리 모티머)은 해안 마을 하드버러에 서점을 열고자 합니다. 그녀에게 그곳은 남편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특별한 장소이기도 했지요. 거미줄 가득한 낡은 건물을 구입하여 수리한 후, 작은 바닷가 마을의 영리한 소녀 `크리스틴`을 채용해 서점을 운영하게 됩니다.




14.png


보수적인 지역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인 플로렌스는 책을 통해 마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지만, 작고 외진 마을에서 서점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최고 권력자인 바이올렛 가맛 부인(패트리시아 클락슨)은 서점 자리에 문화센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온갖 경제적, 사회적 압력을 가하며 그녀의 길을 막습니다.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굴하지 않고 서점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그녀의 용기는 마침내 어린 크리스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이후 크리스틴의 서점으로 이어지는 큰 유산이 됩니다.




15.png



12.png



코를 박고 글을 읽는 장면은 책이 주는 생명의 숨결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낯선 작은 마을에서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다시 시작하려는 그녀의 고독한 용기와 희망이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화면 속에서 은은하지만 강하게 전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공의 고난을 보며, 길 모퉁이 작은 서점과 거대 자본의 초대형 서점간의 대립이 갈등 구조로 등장하는,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의 오래전 영화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1998)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손안에 든 전자기기로 소통은 물론이고 실시간 영상 등을 공유하고 업로드할 수 있지만, 당시 영화가 나오던 그 시절엔 인터넷으로 소통을 한다는 것은 혁신적이었지요. 이메일로 주고받는 메시지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그 시절의 디지털 감성은 특별합니다.




22.png




23.png


메일을 주고받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호감을 갖게 되는 캐슬린 켈리(맥 라이언)와 조 폭스(톰 행크스)는 인터넷상에서는 서로에게 솔직하고 다정한 친구였지만, 현실에서는 치열한 경쟁자가 됩니다. 익명의 이메일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했던 그 관계는, 현실의 경쟁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비되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보여줍니다.



뉴욕 맨해튼에서 ‘모퉁이 서점(shop around the corner)’이라는 작은 어린이 서점을 운영하는 캐슬린 켈리(맥 라이언)와 초대형 체인 서점(Fox Book)의 대립은 자본주의 도시가 가진 냉혹한 현실을 드러냅니다. 뉴욕 브로드웨이 근처에서 오래된 아기자기한 동화책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캐슬린은,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와서 책을 고르고, 따뜻한 교감이 오가는 ‘작고 따뜻한 공간’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톰 행크스가 연기한 조 폭스는 거대한 체인형 대형 서점의 경영자로서, 바로 그 근처에 대형 매장을 오픈해 버립니다. 자연스럽게 캐슬린의 가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죠.




24.png




21.png



25.png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큰 서점이 작은 서점을 삼켰다"라는 구조적 비극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메일이라는 신기술 속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의 진심을 발견하고, 사랑을 통해 다시 인간적인 온기를 회복하는 것을 전달하고자 한 듯합니다.



영화를 보던 때는 아직 뉴욕을 가보기 전이라, 뉴욕의 거리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들도 더 기억에 남았던 영화지요. 어쩌면 낯선 익명성이 오히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게 만들어, 사랑이 싹트는 공간이 되는 디지털 시대의 소통과 주인공들의 사랑 등이 담겨 있는 영화로 기억됩니다.



또 다른 영화 노팅힐(Notting Hill, 1999)에서는 서점은, 여행 전문 서점 주인인 휴 그랜트(Hugh Grant)와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의 로맨스에 어울리는 따뜻한 느낌의 소품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긴 하지만, 런던의 풍경과 음악과 더불어 아름답게 기억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런던의 작은 여행 서점은 세계적인 영화배우와 무명의 서점 주인을 이어주는 우연의 무대가 됩니다. 화려한 스타와 평범한 일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점은 두 세계를 잇는 다리이자 사랑이 자라는 은신처로 변모하지요. 여기서 서점은 꿈과 현실이 맞닿는 기적 같은 공간이 됩니다.



34.png



31.png




32.png



33.png

사진출처: IMDb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서점’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색채는 조금씩 다릅니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책과 서점이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와 삶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작은 서점은 때로 거대 자본에 밀리고, 권력에 의해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연한 사랑의 씨앗을 틔우기도 합니다.



책은 현실에서 무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깊고 진한 위로가 필요할 때,

길을 잃고 막막할 때,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삶의 한 장면을 열어주는 문이자 사랑과 고독을 담아내는 그릇이 됩니다.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라는 말은, 그만큼 책의 중요성과 순기능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을 넘어, 인간의 고독과 사랑, 저항과 희망이 켜켜이 쌓이는 삶의 풍경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의 서점은 점점 줄어들고, 책을 손에 드는 사람도 드물고 온라인 구입을 선호하는 경향이 증가하며, 작은 공간에 켜켜이 쌓인 삶의 숨결은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서점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품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숨결이 됩니다. 바쁘고 디지털화된 세상 속에서도, 책과 서점이 있어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잃어가는 듯 보여도, 그 안에는 여전히 생명처럼 살아 있는 온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시대는 저물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점은 숨 쉬듯 살아 있어, 많은 책방에서는 독자와 조용히 호흡하고, 말을 나누고, 작은 온기를 전합니다. 시인은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고 '따뜻한 책'을 전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책

이기철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꾼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의 비타민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이기철,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41.png




내일은 비타민 섭취를 위해 책방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