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허세, 실제 능력이나 지위보다 과장된 자아를 드러내는 태도로, 문학과 역사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절대적인 천재이자 ‘유럽의 주인’이라 믿으며 무리한 정복 전쟁을 지속하고, 결국은 엘바 섬으로 유배되어 최후를 맞이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허세.
‘민중의 여왕’이란 이미지 구축을 위해 사치스러운 복장과 행사로 대중의 환심을 얻으며,
일시적 영웅이 되었으나 허세의 모습으로 채워진 이미지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던 에바 페론.
정치적 허세가 어떻게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독재자들의 몰락. 그들의 허세는 개인의 몰락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전체의 손실.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위대한 기사’로 자기기만을 포장한 돈 키호테의 주인공 세르반테스의 허세.
‘계몽된 신지식인’으로 자처하지만, 미성숙하고 위선적인 허세로 내면의 공백을 묘사한 이광수 소설 『무정』의 이형식.
문학 속의 ‘허세’는 단순한 과장이나 위선이 아니라, “결핍을 감추기 위한 외적 장식이며, 상황적 불안과 내면 공허가 만든 사회적 가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기기만의 언어 ‘허세’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인물의 진실이 드러나고 서사의 비극이 전개되거나 또는 마무리되지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본래 순수하고 착한 아이지만, 크로머 앞에서 자신이 강하고 대담한 사람처럼 보이고자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 허세를 내세우다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놓이게 되지요. 그 짧은 거짓말은 순수의 세계를 떠나는 그의 첫 발자국이 되었지요. 악의도, 탐욕도 없는, 그저 자신의 나약함을 들키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숨어 있는 허세의 대가로 싱클레어는 잔꾀가 많고 악의적인 크로머 굴욕적인 명령을 비굴함을 느끼며 수행하게 되고요.
크로머는 그의 허세를 빌미로 협박했고,
싱클레어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스스로의 거짓에 예속되었으나...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어둠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의 진실을 배우게 됩니다.
“ 나는 내 구두에다 더러움을 묻혀왔다.
...
운명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제 내 범행이 절도였든 거짓말이었든(나는 하느님과 목숨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왜 나는 함께 갔던가?
왜 나는 일찍이 아버지 말에 귀 기울인 것보다 더 크로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왜 나는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적이 나를 뒤쫓고 있다.
한순간 나는 더 이상 내일의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의 길이 이제 점점 더
비탈로,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무서운 확신을 느꼈다.”... 『데미안』 중에서,
만일 데미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다는 사소한 허영심이, 그를 한순간에 거짓과 공포의 세계로 밀어 넣다니...
어쩌면 크로머는 단순한 불량소년이라기보다, 싱클레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던 두려움과 죄의식, 그리고 억눌린 욕망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크로머에게 예속된 날들 동안, 싱클레어는 자신이 그토록 믿어왔던 ‘선한 세계’가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으로 어둠을 인식하는 눈을 얻는데, 그 눈은 두렵고 낯설지만, 바로 그 눈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심연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지요. 첫 번째 문턱은 ‘타락’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시작이었다고 보면 지나친 확장일까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사랑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끝내 자신을 구하지 못한 채 생을 던지고 말지요.
그가 남긴 말, “사람의 운명이란 제 한계를 감내하면서 자신의 술잔을 비워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 구절은 인간이 감정의 극한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마주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는지요.
그 잔은 달콤하지 않습니다.
“이 잔은 인간 예수의 입술에도 쓴 잔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잔을 단숨에 삼키지 못하고,
달콤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를 부리며 고개를 들까요?
그것은 살아 있으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인가요.
허세는 견디기 위한 의식,
쓰디쓴 잔을 마시기 전 입술에 덧바르는 마지막 달콤한 거짓으로 보입니다.
싱클레어의 허세와 베르테르의 고백은 닮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가짜 강함’이라는 방패를 들었습니다.
싱클레어는 허세를 통해 고통과 직면했고,
베르테르는 허세를 버리고 감정의 끝을 보았습니다.
나도 모두 그들처럼 쓴 잔을 들고, 그 잔을 달콤한 척하며 마시려 애쓰고 있지는 않은지,
그 허세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한계를 견디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글들을 통해 나 자신을 비춰보며 점검하는 오늘 -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