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2002년에는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26-1번 버스를 타면 강북에서 강남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나는 주 7일 모두 강남 한복판을 분주하게 걸어 다녔다. 아니, 강남의 내로라 하는 아파트 단지들을 돌고 또 돌았다. 압구정 구현대, 신현대, 청담동 삼성래미안
돈을 빨리 벌고 싶었던 나는 회사에 취업하는 대신 소개로 들어오는 과외를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한 명에서 시작했던 과외 학생은 어느덧 열일곱 명을 넘어섰다. 아빠의 사업 부도로 갚을 빚이 불어난 집에선 통장 살집이 오르기 무섭게 돈을 가져갔지만 상관 없었다. 부모님이 빌려 가는 속도보다 과외비의 입금 속도가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26-1번 버스 대신 택시를 잡아타고 아파트 단지들을 오갔다. 하지만 강남에선 흔하디흔한 게 백화점인데도 구경하러 다닐만한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학생을 지도하고 나면 밤 12시 30분. 할증 걱정하지 않고 택시를 잡아탈 수 있는 것만이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의 전부였다.
하루 세 집을 돌며 과외 하다 보면 해는 금세 저물었다. 가끔 학생이 수업 펑크 내는 날엔 선물이라도 받은 듯 기뻐하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곤 했는데, 그날은 압구정역에 우뚝 서 있는 백화점에 가보고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백화점 가본 적 있어?”
엄마가 알고 있는 브랜드는 ‘닥스’가 전부였다. 이유는 우리 동네에 ‘닥스’파는 아줌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닥스를 중간 유통을 없애고 라벨을 제거하여 반값도 안 되는 돈에 팔고 있다고 했다. 단속을 피하느라 옷장 안쪽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물건을 꺼내면 동네 아줌마들은 본인의 치수 찾기에 열중했다.
엄마는 백화점 매장에선 옷을 뒤적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고르지 못했다. 옷을 고르기보단 가격 조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쇼핑을 어려운 숙제 대하듯 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는 내 성화에 못 이겨 16만 원짜리 바지 한 벌을 겨우 골랐다. 딸이 사 준 바지를 쓸어내리며 확실히 백화점 질이 좋다면서도 이 돈이면 닥스 아줌마네 가서 세 벌 살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백화점'이란 곳에서 '쇼핑'이란 걸 해보라고 건넨 백만 원을, 엄마는 결국 닥스 아줌마네 들러 아빠의 셔츠 두 벌과 바지 한 벌, 본인의 지갑을 구매하는 데 썼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다음번에 신상 패딩이 들어오면 또 오마고 큰소리로 예약한 뒤 자리를 떴다.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엄마가 ‘강남 싸모님’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용돈 백만 원을 드렸던 날. 엄마가 천천히 입을 떼셨다.
“하루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딱 죽고만 싶은 거야. 갓난쟁이인 너를 업고 스님을 찾아갔어. 네 이름을 지어준 스님이셨어. 스님, 이대로는 죽을 거 같아 못 살겠어요. 어찌해야 하나요. 스님 앞에서 우는데 스님이 네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그러시잖아? 이 아이가 크면 모든 게 다 잘 될 테니 기다려보라고. 아니 갓 태어난 아이가 클 때까지 기다리라니 지금 딱 죽으란 소리로 들리더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너를 업고 오는데 없던 힘이 솟더라고. 이상하게 그렇게 될 것 같았어.”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흘렀다.
엄마와 백화점에 들러 첫 모피코트-무려 천만 원에 달하는! 장기 할부 12개월!-를 선물하고 카페에 앉아 숨 돌릴 때였다.
“딸, 그거 알아? 네가 어릴 때 엄마에게 백화점에서 가격표 보지 않고 물건 사게 될 날 올 거라고 했던 말. 엄마는 그거 내내 기억하고 있었어.”
스님의 얼렁뚱땅 예언을 철석같이 믿은 엄마의 간절한 바람에 신이 응답한 순간이었다.
스님의 말은 예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저 호된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새댁을 위로하려던 찰나 등에 업힌 내가 보였을지도 모른다. 자식이 크면 효도할 거라는 예언은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당장 책임질 필요없다. 게다가 자식이 잘 된다는 데에 믿지 않으려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첫애 낳고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부모와 자식도 궁합이 있어서 자식을 낳은 후 부부 사이가 더 좋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잘 지내던 부부 사이가 틀어지기도 한다고. 갓 태어난 입장에선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은 늘 ‘탓’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런 심리를 반영하듯 궁합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적용한다. 이 속엔 비겁한 책임회피가 숨어 있다. 우주가 정해놓은 시나리오 같은 것이 있다고 믿으면 한결 마음이 가볍다. 포기의 과정에서 나를 ‘탓’하는 대신 나를 ‘연민’ 할 수도 있다.
“어쩌겠어. 이미 그렇게 정해진걸.”
물론 나는 궁합을 믿는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인연’은 강력한 끌어당김의 법칙을 다르게 표현한 단어라는 생각도 든다.
거듭된 임신 실패 때문인지 세 번째 임신했을 땐 주변에 알리는 걸 꺼렸다.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가족에게도 임신 사실을 숨겼을 정도였다. 그래도 과거와는 다르게 내 모습이 괜찮아 보였던 모양이다.
“뱃속 아기가 너랑 잘 맞는가 보다. 네가 그 전이랑은 전혀 딴판이다.”
아마 이 무렵 부모와 자식 궁합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왕이면 뱃속 아기와 나의 궁합이 잘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덧 외엔 이렇다 할 임신 부작용 하나 없는 것도 아기와 나의 궁합이 잘 맞는 덕분이라고 해석했다. 뭐든 뱃속 아기에겐 좋은 것만 갖다 붙였다.
일기장과 책 한 권 들고 집 앞 커피숍을 찾았다. 한가한 오후였고 볕을 느리게 담아 따뜻하게 데워진 창가에 앉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이 행복해서 울컥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시시때때로 평온하다고 느꼈고 그 자체로 감사했다. 가끔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행복했는데 그렇다고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없었다.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리던 중, 남편이 문자를 보냈다. 왜 통장을 확인하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 무렵 남편이 월급 들어오면 가족 통장에 돈을 이체했고 나는 확인했다는 의미로 “한 달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껴 쓰겠습니다.”라고 남기곤 했다. 남편의 성화에 재빨리 월급 통장을 확인했다. 남편이 재취업한 후 겨우 수습 딱지를 뗀, 작고 소박한 월급을 받았던 때였다. 남편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정확한 액수를 공개할 수는 없으나 통장에 찍힌 금액은 전 달에 비해 백만 원이라는 돈이 더 찍혀 있었다.
“여보, 통장에 돈이 이상하게 찍혔어! 뭐가 잘 못 된 거 아냐?”
“잘못된 거 아냐. 그게 앞으로 내 월급이야. 우리 아기가 아무래도 행운을 가져다주는 거 같아.”
차 한 잔과 일기장과 바삭한 햇살, 그 정도로도 소름이 돋을 만치 행복했던 그 순간. 남편은 백만 원이 넘는 월급 인상에 내적 환호성을 질렀을 테지. 남편의 파장이 그 순간 내게로 전달되어 소름이 돋았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너희가 태어나면서 엄마, 아빠는 부자가 되었어.”라는 말을 일부러 자주 했다. 물론 부자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니 재산 정도가 어떤지 묻는다면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은 없음을 미리 밝힌다. 다만 우리 부부는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기대하고 상상했던 이상의 것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부자라 여겨도 되지 않은가. 모든 것이 충분했다.
"엄마, 아빠는 가난한 부부였어.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아기를 신이 보내주셨어. 눈이 처지고 하얗고 방실방실 잘 웃는 아기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주셨지. 그 아기는 행운을 몰고 다니는 아기였는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아빠는 돈을 엄청 벌기 시작했지. 가난했던 엄마, 아빠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몰게 되었는데 모두 너희가 태어난 후에 일어났어."
부작용이 있다면 요 녀석들은 진심으로 본인의 덕으로 집도 사고 차도 샀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가끔 말썽을 피워대는 아이들 때문에 한숨이라도 푹 내쉴라치면
"나는 행운의 남자라서 내가 태어난 다음에 이 아파트를 산 거야. 맞지?" 하는데 첫째와 둘째 중 누가 더 가정 경제에 이바지했는지 따지며 다툴 땐 어이가 없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