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해가 떴을 시각에도 불구하고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어 오늘 아침은 꽤나 우중충하다.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곧 들이닥친다는 긴급뉴스 때문인지 이따금 비를 머금은 바람을 느낄 때마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스치기도 했다.
태풍으로 당분간 아침 산책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늘은 평소보다 오래 걸을 생각으로 안심습지를 끼고 도는 1시간 반짜리 산책로를 선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 허리 높이만큼 자라 산책로까지 침범하던 잡초들이 제법 다듬어져 있었다. 다홍빛, 하늘빛 나팔꽃과 자그마한 주홍빛 메꽃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활짝 피어 있었고, 같은 덩굴과인 인동덩굴도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주변 공기에 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잠시 멈추어 인동초에 코를 갖다 대고 심호흡을 했다.
여름이 지나가도록 땅 자리를 차지하던 민들레를 밀쳐내고 그 자리엔 귀여운 강아지 꼬리를 닮은 연둣빛 강아지풀이 정복자처럼 피어 있었다.
그런데 안심 습지 주변에는 제법 크고 붉은 빛을 내는 낯선 강아지 풀이 길 따라 심어져 있었다. 알고보니 ‘수크령’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잡초다. 강아지풀과 수크령이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의 차이일까? 귀엽다기 보다는 억새고 쓰다듬기에는 징그러워서 영 정감이 가지 않는다.
드문드문 군락을 이룬 레몬 빛 달맞이꽃은 자꾸 발길을 멈추게 한다. 너무 예쁘다.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모르겠다.
가을 조성길로 꾸며놓은 코스모스 군락지에서도 사진을 연신 찍었다. 코스모스는 색상도 다양하지만, 꽃잎 모양과 꽃잎 수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관찰하며 알게 됐다.
산책하는 동안 짝을 찾는 가을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어 먹구름만 아녔다면 태풍은 그저 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안심 습지가 끝나는 갈림길에서 산책로 대신 농경지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했다. 농로를 따라 걷다가 자그마한 사과가 꽃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나무를 발견했다. 너무 신기해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으니 주인아주머니가 오라고 손짓하더니 과수원 안을 구경시켜 주셨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정말 탁구공만 한 미니 사과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아주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과의 이름은 루비 보석처럼 빨갛고 예쁜데다 사이즈가 작아서(small) ‘루비에스 미니’라고 한다.
인심 후하신 주인아주머니 덕분에 공짜로 몇 개를 시식했는데 루비만큼 이쁜데다 잘 익은 딸기처럼 맛있었다. 덤으로 루비에스 미니가 달린 곁가지까지 선물로 받았다.
온통 잡생각으로 한량처럼 걷던 산책길이 오늘따라 무척 애틋했다.
안심 습지로 이어지는 매호천은 하류천이기 때문에 굳이 집중 호우가 아니더라도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산책로까지 강물이 범람해서 흙이 쓸려와 쌓이는 곳이다. 며칠 뒤 상륙할 태풍이 콘크리트마저 날릴 정도라고 하던데 연신 이쁘다고 눈에 넣어두었던 자연 생명들은 어찌 될까? 루비에스도….
곧 수마로 할퀴어질 이 아름다운 생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당분간 즐길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내 문제에 너무 급급해서 여태 자연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살고 있다는 감사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다기온다.
‘힌남노’ 태풍 예보처럼 기후 위기로 인해 닥칠 재앙을 미리 통보받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