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어쩌다 발견한 하나 남은 퍼즐 조각

오늘도 어김없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 덮개 위 키보드를 두드린다. 졸린 눈을 비비며 머리카락을 넘겨본다. 온열기가 차가워진 방안의 공기를 데운다. 깜깜한 새벽, 무대 위에서 핀조명을 받고 있는 주인공처럼 방 안의 불빛은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다. 갑작스레 켜진 핸드폰 속 음악에 깜짝 놀란다. 왜이리도 소리가 큰지. 얼른 나는 소리를 줄여본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키보드를 두드리면 가끔씩 음악이 켜져 깜짝 깜짝 놀란다. 어두운 집안의 한 가운데 방의 불빛에만 의지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린다. 오늘따라 피아노 위 돼지저금통의 빈 눈이 무섭다. 돼지의 빈 눈 위에 아이가 그려서 붙여 놓은 눈이 마치 나를 지켜보는 듯 해 얼른 떼 버렸다. 뗴 버린 빈 공간도 오늘따라 무섭다. 입은 벌린 채 웃고 있다. 오로지 온열기의 주황색 빛만이 나를 감싼다. 잠옷바지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고양이인지 곰돌이인지 모를-귀가 쫑끗 세워진 그것이 세모 눈을 하고 있다.

서울예대 문창과에 입학하고 싶었다. 결혼 후 찾아온 작가라는 꿈을 이루고 싶었다. 마침 서울예대는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시험을 보기 위해 과외를 알아 보았다. 나는 과외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용인으로 갔다.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그렇게 과외를 받았다. 이메일로 선생님이 보내주는 사진을 묘사해 답장을 보내는 과제가 매일 주어졌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끔은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잊혀질 때가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연결이 되지 못하고 하나씩 사라졌다. 이뤄내지 못한 내 꿈들이 부끄러웠을까. 부모교육코칭 전문가 1급 수업 중 생활 연대기를 그리는 과제를 했었다. 분명 나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든 기억들을 적지 않았다. 아니 나는 잊고 있었다. 잊혀져 가던 그 기억의 조각이 내 꿈을 통해 다시 맞혀져 간다. 퍼즐을 하듯. 하나씩 없어져 빈 공간이 되어버린 퍼즐 판의 하얀 그곳에. 어쩌다 발견한 하나 남은 퍼즐 조각을 다시 판에 끼운다. 완성 된 퍼즐을 바라보며 나의 뇌가 말했다. 찾았다.

피아노 위에는 세 마리의 돼지가 있다. 세 개의 저금통. 그 중 하나는 새끼 돼지 세 마리를 업고 있다. 이 곳에 이사오기 전 놀러 갔었던 승혜 친구의 집에서 가져왔다. 친구의 엄마는 신협의 직원이었다. 새 아파트였다. 집안이 온통 새거였다. 반짝였다. 드넓은 집. 가구들이 가까울 수 없었다. 마지막 곡이 재생되었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핸드폰 화면에 띄어진 한 문장 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를 말해주었다. 판타지 영화 속 미션을 마주한 주인공처럼 메시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을 보았다. 돼지의 빈 눈이 나를 보았다. 돼지를 돌려 놨다. 돼지의 등에는 둘째 아이가 붙여 논 날개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핀을 붙여 놓았다. 등과 머리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모호한 경계선에 핀이 있었다. 돼지 위 새끼 세마리가 잠들었다. 주황색, 파랑색, 노란색. 크기가 같은지 다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 아이들이 차례대로 엎드려 누워있다.

첫째의 피아노 책들이 둘쭉날쭉 꽂혀져 있다. 소나티나가 제일 앞으로 튀어나와있었다. 아이가 콩쿠르에 나가 친 곡이 그 책에 있었다. 아이가 들고온 트로피는 그곳에 없었다. 트로피 함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꿈이 피아니스트라고 허공에 말했다. 줌으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평소 피아노를 쳤다가 거실로 나와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피아노 책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이는 유투브로- 영재발굴단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박지찬이라는 아이가 운영하는 채널의 영상들을 즐겨본다. 나는 승혜에게 물어보았다. 피아노를 계속 치고 싶고 배우고 싶은지를. 네가 이루고 싶은 꿈을 머리로 그려보라 말했다. 승혜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유투브로 네가 좋아하는 영상만 보지말고 피아노 연주 영상을 찾아서 보라고 했다. 영재라 불리는 또래들의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대형 서점의 베스트 셀러와 에세이 코너 선반 위에 이경진 작가의 신간이 올려져 있다.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이경진 작가. 베스트 셀러 작가로 발돋움한 그녀의 이야기가 벚꽃이 만개한 봄날 우리를 찾아왔다.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그녀만의 감성을 당신에게 선물합니다. 책 표지를 싼 하얀 종이 위에 담겨있는 글이다. '이 달의 추천작'이 써있는 서점 중앙의 매대에도 올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기웃거리다 내책을 보자마자 입꼬리가 올라가고 두 눈은 반달이 되어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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