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큰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산은, 시내의 남서쪽 12Km 지점이다. 기린대로에서 멀지 않은 쪽구름로에는, 조촌초등학교와 문방구가 쪽구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문방구 안쪽의 방 한 칸짜리 셋집은 마당을 공유한 다른 셋집들과 또 옹기종기 마주 보고 있다.
문방구집 아이 초코송이는, 지금 문방구 기둥에 묶인 채다. 시내에 물건 떼러 간 초코송이 엄마 없이, 혼자 가게와 초코송이를 맡게 된 할머니가, 부산스러운 외손녀가 행여 쪽구름로로 뛰어들까 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처음엔 할머니와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줄 알고, 기대에 차 가만히 몸을 내주고 기꺼이 묶인 초코송이지만, 뛰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떴던 오늘 아침, 엄마가 빨아 널은 인형 몽실이와 눈이 마주쳤다. ‘거꾸로 매달린 그 녀석이 되게 웃기고 재밌었는데’. 그리고 몽실이 옆으로 쑥 들어오는 엄마 얼굴, 잘 잤냐며 웃어주던 엄마. 전날 저녁, 빨간 모자가 된 마냥 신이 나 키를 쓰고 ‘수영엄마(제 2의 엄마로 삼으란 뜻으로 수양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으나, 초코송이는 자신의 협소한 인식 틀 안에서 수용 가능한 단어인 ‘수영’엄마인 줄 안다)’ 집에 심부름갔다, 갑자기 소금을 뒤집어쓰게 된 당혹과 슬픔까지 다 잊혀질 만큼, 오늘 아침은 따뜻하고 행복하게 시작되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고, 엄마랑 할머니랑 살 수 있는 것, 여기 태어난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느낌에 겨워 포근하고 노곤했다.
그러나 사단(事端)은 낮에 있었다. 할망구가 뭐라고 하고 갔는지 엄마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숨짓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와 “저년 잡아라~”하는 고함에 가슴이 철렁한 엄마가, 집주인 할망구에게 “무슨 일 났어요? 누굴 잡아요?”라고 물었을 때, 할망구는 “누구긴. 댁의 딸 말이여!”라며 엄마를 매섭게 쏘아본 것이다. 우린 그냥 논 건데 명신이는 그걸 또 자기 할머니에게 이른 거다. ‘다신 놀이에 끼워주나 봐라.’ 분한 마음에 명신이를 향한 전의를 불태우는 초코송이였으나, 그러면 명신이는 그걸 또 제 할머니에게 이를 것이 뻔하다.
남자가 없는 초코송이네 집에, 엄마는 문방구 물건들을 떼러 시내에 또 혼자 가셨다. 가녀린 목으로 무거운 짐을 이고 올 엄마를 생각하니, 쪽구름로 전부가 뒤덮일 만큼 초코송이 마음에도 그늘이 드리운다. 명신이 엄마는 집안일만 하고, 무거운 건 명신이 아빠가 다 드는데, 왜 우리 엄마는 무거운 것도 혼자 들고, 문방구도 봐야 할까? 심술이 점점 차오르며,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든다. ‘우리 모두 한마당에 모여 사는데, 왜 명신이 할머니가 대장이지? 우리 할머니가 더 언니인데. 우리 할머니가 더 예쁘고, 얘기도 더 많이 아는데!’
초코송이는 명신이에게 거듭 앙심을 품어봤으나, 그래도 엄마가 슬퍼지는 건 너무 싫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엄마를 떠올린 후 초코송이는, 되도록 명신이는 때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할 수 있을까?’. 이런 건 정말 싫다. 슬퍼지려고 한다. 게다가 처음엔 지나는 사람들이 묶인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것이 뿌듯했으나, 이제는 부끄러워지고 있다. 자신을 묶은 고무줄 끈이 한껏 길어질 때까지 달렸다가 몸을 돌려 팽그르르 뛰어 본다. 오가던 학생들과 어른들이 놀라 물러선다. ‘어라? 재밌잖아!’. 칫솔 때문이었다. 묶인 채로 양치 중이던 초코송이의 칫솔이 행여 몸에 닿을까, 사람들이 지레 물러선 것이다. 초코송이는 칫솔을 거리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한다. 다들 “윽!”하고 도망친다. 초코송이는 자신을 더러워하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너무 재밌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 힘세고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 초코송이 속에서 악마가 깨어난다. 초코송이는 이제 아예 “으~!”라며 짐짓 악마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칫솔을 들이대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할머니가 오시는 것도 모르고 몰두하던 초코송이의 시야에, 호랑이 같은 할머니 얼굴이 들어온 것은. 초코송이만큼 할머니의 화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너 때문에 여기서 문방구도 못 하게 되면 어쩌냐”고, “네 엄마 불쌍해서 어쩌냐”고, “내가 대궐 같은 내 집 두고, 너 때문에, 이런 데까지 와서 고생인데!”라는, 예의 똑같은 할머니의 ‘그 말들’이 시작되고 있다. 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왠지 초코송이를 슬프게 하는 그 말들이다. 장난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초코송이는, 어느덧 슬퍼지는 기분에 지고 있다. 여느 때처럼 뜀박질로 슬픔을 잊고 싶지만, 오늘은 묶인 처지다.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초코송이와 쪽구름로에, 따스한 빛이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중국한약방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시는 모습이 어린 초코송이 눈에 띈 것이다. 초코송이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싶은 할아버지는, 능숙하게 할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데......”
“크게 될 애들이, 어려서 말썽이 많지요”.
드디어 초코송이가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기 시작한다. 늘 그랬듯이, 초코송이는 살짝 부끄러워지는 기쁜 맘으로 눈을 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있다.
“부살타구에, 너무 뜨겁다, 덥다, 맵다, 춥다, 심심하다, 도무지 참을성도 없고, 진득하지도 않고...”
“영리한 아이라 그렇습니다.”
우리 할머니 얼굴에, 슬그머니 안도가 떠오른다.
“그렇지요. 성깔이 있어야 커서도 잘 삽디다. 순해 빠진 지 에미를 봐도. 영리하기야 합디다. 벌써 수를 다 알고,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잊지도 않고. 하나를 가르치면 서넛을 알고.”
“그럼요, 그럼요.”
‘이제 다 됐다’. 초코송이는 오늘의 불운이 끝난 걸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초코송이의 마음에 관세음보살과 세상 모든 천사가 깃들고, 세상은 더없이 평안한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초코송이는 이제, 멀리멀리 가고 있다. 자신의 통통한 다리 위로 햇살이 드리웠다 시원한 바람이 지났다 하는 걸 지켜보는 초코송이 옆으로,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난다. 쪽구름로를 건너 조촌초등학교 옆길을 지나 반달로를 향해, 초코송이는 달린다. 초코송이는 빠르다.
해가 지고 있다. 해가 지는 저 서쪽 끝에는 뭐가 있을까? 언젠가 초코송이는 용기를 내 꼭 탐험을 떠나려 한다. 많은 보물과 아주 따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할머니가 다시 좋고, 엄마는 너무 좋고, 중국 할아버지도 좋고, 잠자리에 오줌을 싼 자신에게 어젯밤 소금을 끼얹은 ‘수영엄마’도 다시 좋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명신이와 명신이 할머니도, 이제는 조금 좋다. 부처님이 될 순 없겠지만, 어쩜 착한 아이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초코송이는 기뻐진다. 문득 마음속에서 “문방구에서 딸기맛 젤리 훔치는 것도 그만둘 수 있어?”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잠시 자신을 잃지만, 아무튼 지금은 다 아름답고 예쁘고 좋다. 자전거를 덮치는 센바람을 막아주는 중국인 할아버지의 큰 등 뒤에, 참새 같은 초코송이의 고요한 행복을, 먼발치의 모악산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