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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기묘한 꿈'

꿈으로 시작된 철학 _ 근대 철학과 과학

by Rebecca

오늘은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 근세 시대의 놀라운 변화를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바뀐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과학과 철학, 이성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이때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데카르트, 철학을 한 문장으로 바꾸다

근세 시대는 과학뿐만 아니라 철학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며 한 문장을 남겼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이 한마디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부터 "우리가 감각으로 아는 것은 모두 거짓일 수 있다"회의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지요. 그리고 결국, "내가 지금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짧고도 강렬한 명제는 이후 근대 철학의 기초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세 가지 꿈’


데카르트는 꿈에서 철학을 발견했다

사실 데카르트가 위대한 철학적 사상을 떠올린 것은 한밤중의 ‘꿈’에서였다고 합니다.


1619년 11월 10일, 르네 데카르트(1596~1650) 23세의 젊은 나이로 독일에서 군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평생을 바꿀 기묘한 꿈을 꾸었고, 깨어난 후 "이것이 신의 계시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 꿈을 "근대 철학이 시작된 순간"라고 여겼지요.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꾼 세 가지 꿈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첫 번째 꿈
폭풍 속의 혼란

데카르트는 꿈에서 강한 폭풍이 부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너무 거세서 그는 몸을 가누기 어려웠고, 교회로 들어가려 했지만 몸이 휘청거려 제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몸을 기댄 순간, 한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누군가가 너를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꿈에서 데카르트는 폭풍을 보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의 혼란"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종교 전쟁과 학문적 혼란 속에 있었고, 그는 이 불안정한 시대에서 확실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지요.



두 번째 꿈
천둥과 불꽃의 공포

그가 두 번째로 꾼 꿈은 훨씬 더 불길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천둥소리를 들었고, 불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포에 휩싸인 그는 깨어났고, 온몸이 떨리고 있었지요.


이 꿈은 데카르트에게 "강한 신의 계시"로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나는 신의 뜻을 따라 새로운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는 신호로 해석했습니다.



세 번째 꿈
책과 시를 통한 깨달음

마지막 세 번째 꿈은 이전 꿈들과는 달리, 신비롭고 지적인 분위기를 띠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책상에 앉아 한 권의 책을 펼쳐 읽고 있었습니다. 책에는 라틴어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약 네가 올바른 길을 따른다면, 모든 지혜가 너에게 열릴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해 온 이유와, 인간의 이성(理性)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꿈을 통해 그는 "오직 이성을 통해 확실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 꿈에서 깨자마자, 그는 자신의 철학적 탐구가 올바른 길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고, 훗날 그의 철학 체계를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꿈에서 시작된 철학
‘방법서설’의 탄생

이후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체계화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방법서(Discours de la méthode)'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주장하며, 모든 철학적 탐구의 기초로 ‘이성적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철학은 이후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초석이 되었고,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뉴턴과 사과 이야기의 숨겨진 진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떠올렸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한 가지 오해을 하고 있습니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사과가 머리에 ‘툭’ 떨어진 순간 만유인력을 깨달았다는 것은 사실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뉴턴 본인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가?’라는 의문을 가졌고, 그 생각이 점점 발전하여 결국 만유인력의 개념에 이르렀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뉴턴은 평생 독신이었으며, 그의 연구를 방해할까 봐 애초에 연애조차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보다 자연 법칙이 더 흥미롭다"며, 자신을 철저히 연구에만 몰두시켰다고 하지요.


과학을 향한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만유인력 법칙을 바탕으로 위성을 띄우고, 우주 탐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몽사상의 씨앗, 로크의 자유로운 사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사상가들 중 한 명이 바로 존 로크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라고 주장하며,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로크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심지어 해적들과도 얽힌 독특한 경험을 했던 인물이지요.




로크가 해적과 손잡았다?
17세기 후반, 로크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바하마 제도에서 해적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카리브 해 지역에는 해적들이 많았고, 이들은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로크는 의사로서 그들에게 의료 도움을 제공했고, 덕분에 해적들은 오히려 그의 철학을 듣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훗날, 계몽주의 사상은 해적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모든 선원들이 평등한 투표로 선장을 뽑고, 약탈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로크의 사상이 이런 방식으로도 퍼져나갔다니, 참 흥미롭네요.





뉴턴이 연구했던 물리 법칙,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고, 로크의 자유와 평등 사상,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 이 모든 것의 뿌리는 바로 이 시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만유인력을 이용해 스마트폰을 만들고, 데카르트의 철학을 통해 논리적으로 사고하며, 로크의 자유 사상을 바탕으로 인권을 논합니다.


그러니 가끔은 오늘날의 과학과 철학이 어떤 위대한 인물들의 고민과 노력에서 시작되었는지 떠올려 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다음에도 더욱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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