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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원 Sep 22. 2023

하루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공간




  왕십리로 막 이사했을 때, 물을 사러 집 앞 편의점에 갔다. 편의점 밖에 놓인 2리터 여섯 묶음을 가게 안에 들고 가 결제해야 하는 줄 알고, 그걸 들어 매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걸 왜 들고 와. 다음부터 말만 하면 여기 바코드 찍어줄게.”

  문장으로는 친절함이 전달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김혜자 배우 같다고 표현했다. 표정도 말투도 다정하고 친절한 사장님이었다.



  몇 달이 더 지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며 초콜릿도 집어 들었다. 결제가 끝나고는 바로 사장님께 드렸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사장님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며 놀라면서 고마워하셨다. 그 뒤로 사장님은 간간이 도시락 같은 것을 챙겨주셨다. 어느 날은 처치곤란한 복분자즙이 생겼다. 부모님도 먹지 않는다고 했고 나도 챙겨 먹는 것이 많아 편의점에 들고 갔다. 편의점 밖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위에 얹어두고 안에 들어가 사장님께 복분자를 드시냐고 여쭤봤다. 사장님은 당연히 드신다고 했고, 나는 그대로 복분자즙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뒤로 우연찮게 며칠 동안 편의점에 가지 않았다. 다시 갔을 때는 사장님이 나를 붙잡았다. 자기가 이걸 먹어도 되나 하고 한참을 두셨다고. 그러고는 흰 봉투를 내밀며 용돈 하라고 하시네. 나는 핫바를 하나 꺼내와 핫바나 하나 먹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사장님을 이모라 불렀고, 이모는 날 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에게도, 자주 전화하는 부모님에게도 늘 이모를 자랑했다. 아들 삼고 싶다는 이모와, 그럼 사장님한테 가라는 엄마. 그 말을 전달하면 이모는 나를 진짜 데려간다며 웃으셨다. 나랑 대화하는 중에 손님이 오면, 이모는 나를 아들이라고 했고 손님들은 진짜로 믿고 인사를 했다. 나는 이모가 너무 좋았다. 원룸 계약이 끝나고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이모 때문이었을 거다.



  어느 날은 이모가 잔뜩 화가 나 하소연을 했다. 속 썩이는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얘기였다. 가불도 해주고 시간도 맞춰주고 힘들지 말라고 물건도 본인이 채우는데 그 마음을 몰라준다고. 이모가 착해서 탈이라고 말하면서 이모 얘기를 들었다. 다 듣고 집에 가려다, 편의점 옆 카페에 들렀다. 아메리카노 차가운 것 하나, 따뜻한 것 하나, 바스크 치즈케이크 하나.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를 고르게 하고 케이크를 드렸다. 단 것 좀 드시라고.



  드라마를 보면 종종 분위기를 환기해 주는 식당이나 술집이 나온다. 주인공이 힘든 하루를 보내고 술집에 들어가면 사장님이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드라마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거나 정리해주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위로가 되어주면서 말이다. 내게는 그런 편의점이었고 그런 사장님이었다. 반겨줄 이모를 기대하며 발걸음이 가벼워졌고, 가끔씩 주시는 편의점 치킨이나 도시락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힘든 하루를 보냈어도 이모 덕분에 잠깐이나마 즐거울 수 있었다. 이모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 말했다. 마음이 곱고, 착하고, (잘생겼고,) 센스 있다고 했다. 그건 이모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건데. 다 이모 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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