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
“...”
“그냥 하라는 대로 해”
그는 성공한 (아직은 해임의 조짐이 없는) 임원입니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임원이었고 지금은 규모가 훨씬 큰 중국 사업장을 맡은 실력 있는 임원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었기에 얼마 전 메신저를 보냈습니다. ‘잘 지내나?’ 안부 인사에 ‘걍(그냥) 버티는 거지. ㅋㅋ’란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쯤 되는 지위의 사람들은 십중팔구가 그렇답니다.
임원들은 살벌한 임원 계약을 1년마다 합니다. 잘 버티는 부차장이나 담당 직원들이 직장생활을 오래 합니다. 어떻게 해야 잘 버티는 것일까요?
“네, 네. 그럼 과장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로 하겠습니다. 계약 내용은 제가 확인했고요, 일정에 맞춰서 진행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통화를 끝내기도 전에 한 칸 건너편의 팀장이 나를 잔뜩 째려보며 소리를 지릅니다. “야! 니가 다 결정하냐? 뭘 니 맘대로 그렇게 해? 하지 마! 당장 취소해”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며칠 동안 수시로 상황 보고도 했고, 내부기안으로 결재를 올리지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진행하기로 한 것인데 말입니다. 아니, 이제 와서 신경질 낼 거면 팀장인 자기가 직접 하면 되지, 나보고 하라며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뭘 해도 건건이 시비를 겁니다. 정말 성질납니다.
“이 대리! 지금 뭐 하고 있냐? 그거 하지 말고, 창고에 가서 재고 파악 좀 해와. 지금 당장 팀장님하고 사장님이 보고하라니까. 얼른 가.” 아니 느닷없이 이게 무슨 말인지, “과장님. 오늘 4시까지 설비 투자 건 마무리해서 기획팀으로 넘겨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갑자기 재고 조사를 하라면, 그때까지 자료 못 만드는데요. 재고 조사는 모레까지 보고하는 것이라면서요.”
사장이 자기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라, 데이터 정리하고 사진 찍고 해야 한답니다. 오늘 밤늦게까지 해도 투자계획서를 마무리하기 힘든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저러는 걸까요? 이건 자기 일, 우리 팀 일이 아닌가요? 다 필요한 일이겠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도 될 일이 있는데 어쩌라는 건지. 지금,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아무튼,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자기가 보고할 것이 제일 급하고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정말 성질납니다.
“자, 공지사항 있으니까 잘 들으세요. 오늘 오후부터 무조건! 외출이나 출장 시 신청서를 반드시 결재받고 나가세요. 보고서는 회사 양식에 맞춰서 반드시 제출해야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렇게 하세요.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그놈 때문입니다. 책상에서 졸고 앉아 있다가 10시쯤 되면 고객사 다녀온다고 쓱 나갑니다. 나가면 전화도 잘 받지 않습니다. 누가 우연히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답니다. 다녀와서는 팀장에게 뭐라고 간단히 보고하고, PC 앞에서 뭐 끄적거립니다. 항상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놈 때문입니다. “아니, 팀장님! 외출이나 출장 다녀오면 바로 회의록 작성해서 보고 드리고, 공유할 사람들에게 이메일로 모두 보내는데, 출장보고서에 적고, 회의록이나 이메일로 적고, 꼭 두세 번 일해야 합니까?”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한마디 했습니다. 그놈도 들으라고요. 한 사람을 똑 부러지게 잡지 못하니, 수십 명의 직원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지사항대로! 해야 합니까? 정말 성질납니다.
최고 권력자의 결정 사항이니 따르라고 합니다. “정리정돈이 기본입니다. 볼펜도 한 자루면 충분하니,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거나 버리세요. 회의가 너무 많고 오래 하고 있으니, 회의를 반으로 줄이고 한 시간 이내로 모두 끝내세요. 그리고 우리 회사 영업팀은 우리 고객과 똑같습니다. 그 팀의 요구사항은 고객이 하는 말씀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로 따르세요.”
다 맞는 말씀이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호되게 야단을 치고 윽박지를 것입니다. 3정 5S, 회의 효율화, 고객 만족 마인드 뭐 이런 겁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알긴 알겠는데, 어느 정도 방법을 찾아보고, 할 수 있는지 확인도 해 보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지 토론도 좀 하고, 뭐 이런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요? 자기 기분대로 소리 지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소리 지르면 마당쇠처럼 굽신굽신하길 원하는지. 우리는 점점 아무 생각이 없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무 생각 없는 사람 때문에. 정말 성질납니다.
“상무님 말씀대로 B 사 말고, A 사에 설계 도면과 견적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단가만 봐서는 B 사가 좋은데, 그간 대응이 잘 안 된 것도 많고, 일정도 잘 안 지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말을 끊더니 “언제 내가 그랬어? 응? 언제 그랬어? B 사로 하라고 했잖아, 너 내 말 안 들었어? 누가 A 사로 바꾸라고 했어? 일 똑바로 안 할래?”
기가 막힙니다.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어서 휴대전화에 녹음해 놨는데, 녹음한 것 들려주면 아마 날 죽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성질납니다.
동그란 네모를 그려라? 사람과 사람이 통하지 못하면 결국엔 한쪽이 포기하여 맞춰주거나,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것 두 가지밖엔 없을 것입니다. 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결국 각자 생각하는 금전적, 비금전적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가 되기도 합니다.
본인의 이익을 따져, 회사에서 버티기를 한다면 당신을 괴롭히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주고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요상한 논리나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즉, 그들은 그런 위세를 행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유가 당신의 이유와 다르든, 틀리든, 감정을 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좋은 태도는 아니지만, 기왕 버티기로 했다면 이렇게 해 보십시오. 시간은 지나고 월급날은 다가옵니다.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리고,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재미로) 건건이 물어보면서 (똑같이) 하세요. 좋아할 겁니다. 그리고 모든 공은 그에게 돌리세요. 다만, 일하면서 그가 아니라 당신이 한 일이란 소문은 살짝 내세요.
이런 행동이 모두 정상이 아닙니다만, 그 밑에서 버티는 것도 능력이라면, 감옥 갈 일 아니면 맞춰주세요. 지금 그 사람도 이런 일, 저런 일, 더 심한 일 다 겪으면서 그 자리에 왔다고 할 것입니다.
임원 간의 충돌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오너나 사장이 있고, 그의 지휘를 받는 임원들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서 그냥 하라는 대로 한다? 배임? 횡령? 그럴 수 있는 사안이 있지만, 이것이 가끔은 세력을 다투는 그들만의 이슈가 될 수 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지, 내 권한과 자리를 넘봐?”라는 입장과 “누가 자리를 넘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회사가 이익이라 드리는 말씀인데”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이런 입장입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상황들 모두 경영의 완전한 실패입니다. 이래서 사람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공유 가치’가 필요합니다. 핵심 가치라고도 하는데 기업에서의 공유 가치는 조직 내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제시하는 기본 규범이며, 기업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이자 신념을 말합니다.
우선, 최고 경영진의 진지하고 치열한 대화와 결정이 장기간 필요합니다. 약 3개월 정도를 생각하고 한 달에 두세 번 회의해야 합니다. 우리 사업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 본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인재가 필요한가? 그 인재는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10가지 전후로 요약합니다. 명확한 문장이어야 하고, 단어 하나하나의 선정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 중요한 미팅의 참여자 모두가 동의한 내용은 곧바로 공표될 것이고, 참가자 전원은 분담하여 공유회를 갖도록 합니다. 충분히 설명해야 합니다. 직원들이 이해가 될 때까지 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신입이든 경력이든 직원을 채용할 때부터 그 사람은 이 기준에 적합해야 합니다. 때론 급하게 인원이 필요해도 이 규범, 공유 가치와 어긋난다면 절대 채용해서는 안 됩니다.
분기별, 반기별 또는 연간 시행하는 인사 고과에도 이 규범과 공유 가치가 가장 비중이 큰 평가 항목이어야 합니다. 과업의 성과지표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하여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항상 유지될 때, 가치는 공유되고, 동그란 네모는 사라집니다.
“힘들어?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