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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노반 May 24. 2022

우리의 아픈 손가락 - 카카오

어제를 버려라 - 김범수

김범수는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 어머니는 초등학교 졸업, 아버지는 막노동과 목공일을 했고, 어머니는 지방에 머물며 식당 일을 했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맞벌이를 했고 항상 일거리를 찾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김범수가 중고등학교 시절 부친은 정육 도매업을 했다. 그 당시 사업을 하면서 겪었던 가정의 어려움을 김범수 가정도 겪었다. 부친의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가정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김범수는 어릴 적부터 모든 계획을 스스로 짰다.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 계획을 세웠다. 그는 놀 때는 걱정 없이 실컷 놀았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행동들은 부모님의 '자유방임주의'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서울대학교에 지원했으나 떨어지자, 김범수는 재수를 결정한다. 집에 압류가 들어온 상황에서 등록금이

싸고 장학금 혜택도 있는 국립대인 서울대학교에 꼭 들어가야 했다.


김범수는 서울대에 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손가락을 베서 혈서를 썼다. 재수를 하는 동안 혈서를 세 번 썼다. 고등학교 때부터 피웠던 담배를 끊기로 했다. 낱개로 파는 까치 담배를 세 개비 사서 책상에 올려놓고 진짜 힘든 때만 피우자고 다짐했다. 1년 후 까치 담배는 두 개비가 남았다.


김범수가 얼마나 의지가 강한 사람인지 이해가 됐다. 혈서를 쓰는 사람을 만나본적이 없다. 그리고 담배를 세 개비 사서 책상에 올려놓고 참았다는 건, 담배를 끊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제가 담배를 끊었을 때는 담배를 최대한 멀리해서 끊었는데 김범수는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그걸 버텨냈다. 보통 사람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학생회관 식당의 밥 500원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 알바를 했다. 대학 생활보다 과외 알바가 주가 될 정도였다. 자신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보낼 돈까지 벌어야 했던 김범수는 남들보다 힘든 대학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김범수는 서울대를 졸업 후 삼성 SDS에 취업했다. 취업 기준은 '컴퓨터를 원 없이 쓸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자'였다. 김범수는 삼성 SDS에서 유니텔 개발에 참여해 유니텔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유니텔 출시 이벤트로 OX퀴즈를 진행했다. 퀴즈는 한 번만 읽어봐도 누구나 맞힐 수 있을 만큼 쉬웠고 O와 X 중에서 답을 클리만 하면 됐다. 이 단순한 이벤트에 무려 7만 명이나 물려 들었다. 당시 PC통신이 지금의 인터넷처럼 대중화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면서 김범수는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온라인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재밌게 즐기는 놀이동산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김범수는 회사에서 어떻게 이 사업을 실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서 새로운 사업을 실행한다는 것은 여전히 제약이 많았다. 새로운 사업은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회사는 새 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느긋하게 오래 기다려 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게임은 당시 변변한 사업 분야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정보 시스템 분야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는 회사에서 굳이 그런 모험을 할 리가 없었다.


여러 측면에서 고심한 끝에 김범수는 '내 힘으로 처음부터 시작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회사를 나오기로 결심을 굳혔다.


삼성 SDS 퇴사를 결심할 당시 김범수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고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렸고, 빈손으로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다.


삼성 SDS를 다녔던 문태식과 창업을 하고 온라인게임 개발에 나섰다.

사표를 던지고 나왔을 때 그가 수중에 갖고 있던 돈은 마이너스 통장에서 마련한 500만 원이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IMF 시대가 됐다. 자금이 말라갔다. 직원들이 하나둘 퇴사하고 문태식만 남았다. 1998년 말 대변신을 시도한다. 자금 마련을 위해 PC방을 직접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PC방을 운영해서 개발 자금을 마련하고 PC방에서 자신이 개발한 게임을 직접 테스트하려는 요량이었다.


PC방이 막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당시 대부분 소상공업자들이 영세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PC방을 하려면 근처 상권을 완전히 장악할 정도로 해야 해. 그래야 게임 사업을 위한 자금을 빠른 시일 내 확보할 수 있을 거야"


남들이 보통 1억 원 남짓한 돈으로 시작하는 PC방 창업을 그는 3억 원을 모아 크게 열기로 했다. 우선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모자라는 금액을 채우기 위해 명동 사채시장도 기웃거렸다. 한 달여를 뛰어다닌 끝에 2억 5000만 원 정도를 모았다.


바로 전에 읽었던 '우리는 미래를 만든다'에서 나온 내용이 생각난다.

전 창업자들이 자신의 사업에 얼마나 걸었는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자기 사업에 자기 돈을 조금밖에 태우지 않은 사람이 정말 목숨 걸고 할 수 있을까요? 창업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자기도 살아야 되고 어쩌고 저쩌고..."  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돌려보냅니다.


내 돈을 태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절실함을 보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범수는 가족이 있는데도 집을 담보로 PC방이라는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야 결과를 알고 있으니,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하겠지만, IMF 당시에 이런 선택을 쉽사리 할 수 있었을까?


김범수는 한양대학교 앞에 당시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PC방을 개업했다. 그가 만든 PC방 이름은 미션 넘버원이었다.


다행히 승부수가 통했다. 이 PC방은 입소문을 타고 한양대 앞의 명소로 떠올랐다. 현금이 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대생이 PC방을 차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범수는 세간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넥슨 초기 김정주도 회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게임과 관련 없는 웹 에이전시를 했었다. 에어비앤비 3명의 공동창업자들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시리얼 박스를 만들어서 살아남았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들이 보인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체면이고 머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에어비앤비의 경우는 시리얼 박스를 팔아서 버텼다는 걸 어필해서 YC콤비네이터에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근성이 없었다면 YC콤비네이터의 생각을 바꾸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PC방 사업이 안정 가도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고민하기 시작한다. 삼성 SDS를 퇴사해서 창업한 남궁훈에게 연락을 한다.


"나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 일단 내가 하는 PC방으로 한번 와라."


남궁훈은 미션 넘버원 PC방으로 향한다. 김범수가 운영하는 PC방의 실체를 확인한 후 김범수의 사업 능력에 믿음을 갖게 되었고, 즉석에서 합류하게 된다.


참고로 남궁훈은 현재 카카오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김범수는 PC방을 운영해 모은 사업 자금 5000만 원을 밑천 삼아 1998년 11월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김범수는 아내에게 PC방 사업을 맡기고 자신은 게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6개월 동안 모든 직원이 밤낮을 잊고 온라인게임 개발에 매진했다.


김범수의 사업 모델은 단순했다. 오프라인에서 이미 대중적인 인기가 검증된 가벼운 게임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바둑, 장기부터 개발했다.


1999년 12월, 마침내 한게임 서비스를 시작했다. 물론 무료였다. 이때 김범수는 PC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마케팅에 나섰다. 전국에 있는 PC방에 관리 프로그램을 무료로 깔아주는 대신 한게임의 아이콘을 컴퓨터의 초기 화면에 띄우는 조건을 제시했다. PC방 관리 프로그램에 대한 입소문을 듣고 이 프로그램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PC방들이 무료로 깔아준다는 말에 한게임을 모두 초기 화면에 띄우는데 동의했다.


PC방을 대상으로 한 영업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최초의 게임포털 한게임이 처음에 큰 무리 없이 회원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PC방을 대상으로 한 영업 방식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PC방 운영과 관리 프로그램 판매만으로도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황에서 김범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관리 프로그램의 무료 제공이라는 과감한 수를 두는 선택을 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거의 공짜에 풀고, 그 대신 그 안에 유튜브나 크롬, G메일 등등을 넣어서 수익을 냈던 것처럼, 세기말 한게임은 PC방 관리 프로그램을 공짜 풀면서 자신의 목표인 한게임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게임은 하루에 가입자가 10만 명씩 늘어나면서 순식간에 1000만 명을 찍을 기세가 됐다. 김범수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획과 영업, 빌링 파트의 인력은 전무했고, 그저 서비스를 하는 쪽 인력도 고작 20명이었다.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게다가 한게임은 자체적으로 아직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한게임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김범수는 회사가 성장하는 데 본인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네이버컴의 이사를 맡고 있는 김정호가 연락을 해왔다. 김정호는 1999년부터 한게임커뮤니케이션과 네이버컴의 합병을 주장해왔다.


이해진이 김범수와 만나 합병을 논의하게 된 시점은 대형 포털 업체들과 힘겹게 경쟁하고 있던 때였다. 네이버의 검색엔진은 사용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사용자 기반이 획기적으로 늘지 않아 고민이었다.


김범수 역시 고민이 있었다. 한게임은 하루에 10만 명씩 회원 수가 늘어나는데 이를 소화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네이버의 풍부한 자금력과 한게임의 막강한 회원 기반이 결합하면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김정호의 주장은 김범수와 이해진이 듣기에 일리가 있었다.


김범수는 네이버컴의 풍부한 자금과 인력을 활용해 폭증하는 트래픽을 소화하면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세 사람은 이 회동을 계기로 네이버컴과 한게임커뮤니케이션의 합병을 합의하고 2000년 4월 27일, 공식 발표했다.


한게임의 엄청난 트래픽과 막강한 회원 수를 기반으로 네이버는 급성장했다. 합병 이후 네이버는 포털 사이트 만년 5위의 한계를 벗어나 1일 페이지뷰 4,000만, 회원 수가 무려 600만 명에 이르는 대형 온라인 미디어의 위상을 과시하게 됐다.



2000년 겨울, 인터넷 거품 논쟁이 일면서 벤처 산업계에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쳤다. 투자 심리가 싸늘하게 얼 어부터 투자 유치는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 됐다.


김범수는 유료화만이 이 살얼음판 위에서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직원들 대부분은 유료화를 했다간 회사가 완전히 끝장날 것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유료화를 해야겠지만, 지금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야 합니다."


유료화에 대한 김범수의 생각은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공짜였던 서비스가 돈을 받아서 망하는 게 아니라 돈을 받는 만큼 값어치를 못해서 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돈을 쓰고서라도 그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돈을 쓰게 될 거라고 봤다.


모두가 반대하고 있었지만, 김범수는 유료화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꺽지 않았다. 오히려 유료화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김범수가 유료화를 결심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한게임의 급격한 확장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 한게임의 급격한 회원 증가는 네이버에 치명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다. 검색 기술을 개발하는 데 계속 돈이 필요했던 네이버는 한게임의 늘어나는 회원을 수용하기 위한 서버 증설과 관리 인력 증강 등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드디어 운명의 유료화 오픈, 2001년 3월 5일 첫날 매출 1억을 달성한다. 네이버 경영진은 한게임 유료화로 예상을 뛰어넘는 수익을 얻게 될 것이란 꿈에 부풀었다. 유료화 둘째 날, 모두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았다. 그런데 첫날에 비해 결제가 형편없이 적게 이뤄졌다. 셋째 날에는 1분의 3 정도 매출이 나왔다.


지금은 어떤 온라인 기업이든 유료화를 처음 시작하면 초반에 엄청나게 결제가 몰리고 이후 급감해 바닥을 찍다가 다시 상승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시엔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유료화에 일단 성공은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결제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게임은 2차 유료화 모델 준비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게임 판 수에 따른 과금 모델이었다. 이 방식은 2001년 7월에 도입됐다. 게임 판 수에 따른 과금은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판 수 이상의 게임을 하려면 한 달에 3,000원을 내야 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과금 방식도 성공적이었다. 이때부터 한게임은 비용보다 수익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게임은 세이클럽에서 아바타를 파는 걸 보고 한 달 뒤 아바타 유료화를 도입한다.


다른 임원들은 유료화를 하기 전에 먼저 사용자들을 끌어모아 충성심 높은 고객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김범수는 다르게 생각했다. 유료화를 단행하더라도 콘텐츠가 경쟁력이 있으면 사용자들이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두가 의심했지만 인터넷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 한게임의 유료화 과정이었다.


한게임 유료화를 성공시키면서 네이버컴은 합병 이후 불어닥친 안팎의 굵직한 위기를 극복하고 인터넷 포털로서 안착했다. 그리고 네이버컴은 2001년 9월에 NHN으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NHN은 2002년 상장 당시 시가총액 450억에서 4년 만에 10조 원의 회사로 고속 성장한다.


이러한 고속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에는 NHN만의 독특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 중심에 '전략위원회'가 있었다. 전략위원회는 일종의 경영진의 집단 토론이 이뤄지는 기구였다.


당시 전략위원회가 열리는 16층 회의실에서는 회의가 열릴 때마다 항상 큰소리가 났다. 보통 경영진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 조용조용하기 마련인데 회의가 벌어질 때마다 격한 토론 분위기가 됐다.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충돌하면서 열띤 토론이 되곤 했던 것이다.


NHN이 전략위원회를 운영하게 된 것은 김범수의 생각이었다. 김범수는 한게임 시절부터 집단적으로 토론하고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범수는 이를 NHN에도 적용했다.


그는 대화를 중시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충돌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충돌이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라는 게 김범수의 생각이다. 충돌한다는 것은 조직이 경직되지 않고 살아 있으며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한 조직이라는 의미였다. 단, 김범수가 생각하는 충돌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신뢰다. 의사결정을 위한 의견 충돌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앙금이 남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수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이 다른데,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그 생각들이 논리를 가지고 충돌하며, 최선의 길을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이걸 못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아마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빅 테크들도 치열한 토론을 거쳐서 의사결정을 한다. 나에게는 낯선 일이지만, 이걸 피하고서는 제대로 된 투자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노력하고 있다.


NHN은 전략위원회에서의 충돌을 통해 조직을 혁신하며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NHN은 고속 성장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이버 사용자가 늘면서 NHN의 중심축이 이동하자 NHN을 이끌던 경영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의사소통이 잘되던 조직의 모습이 사라져 갔다. NHN은 어느새 대기업이 된 것이다.


2007년 9월, 김범수는 네이버를 떠났다. 한게임과 NHN을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치를 초과해서 달성했다. 그러자 스스로 느끼기에 이전보다 의욕이 나지 않았다. 회사가 커지면서 조직을 관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 것도 김범수의 의욕을 꺾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NHN을 나올 때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범수는 NHN을 나올 때 지인들과 직원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배에 빗대서 이렇게 말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압니다."


김범수는 이대로 안주하기엔 스스로 아직 젊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도전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그 도전은 NHN 안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밖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NHN 안에서 있으면서 새로운 도전을 할 경우엔 크게 성공하거나 실패하더라도 그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적었다. 자신만의 힘보다 조직의 힘으로 이뤄지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기업의 틀 안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NHN 안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조직 내에서 쉽게 용인되기도 힘들었고 조직 자체도 경직돼 있었다.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해야 하는데 NHN의 경우 이미 나름의 성공과 성장에 대한 방정식이 있어서 그런 변화를 주기 힘들었다.


기존의 인터넷 환경에서 성장한 기업들은 웹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김범수는 그게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김범수는 패러다임이 바뀔 시기가 오고 있다고 직감했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는 것이 시장의 이치다. 김범수는 이 시기가 1990년대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모바일이 가져올 시장 규모의 변동은 그때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NHN이 100년을 영속할 기반을 갖췄다고 봤고, 또 다른 100년짜리 기업을 만들기 위해 NHN을 나왔다. 모바일 세상에 서는 그런 기회가 더 많을 거라고 기대했다.



내 인생을 위한 결정은 검색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힘든 순간이 오면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순간에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이 답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자신만큼 오랫동안 고민하고 애정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남에게 물어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지 말자.’


김범수는 관점의 차이가 결국 인생을 바꾸고 수많은 결정을 바꾼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생각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침 5시 30분경에 일어나 1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격렬한 운동보다 산책을 선호하는데 산책의 목적이 생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산책을 마친 후 30분 정도 샤워를 한다. 샤워하는 시간으로는 제법 긴 시간이다. 이렇게 산책과 샤워를 하는 1시간 30분은 오로지 생각과 사색, 계획과 결단을 하는 데 쏟는 시간이다. 김범수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샤워를 하고 나면 7시경, 그는 이 시간부터 신문 등 뉴스를 30분 정도 읽는다. 오늘의 중요한 뉴스가 뭔지, 외신 등을 직접 확인한다. 뉴스를 보고 난 후 1시간 동안은 책을 읽는다. 그의 책 읽는 방식은 좀 색다르다. 책에 따라 읽는 방식을 달리하는 게 그의 독서법이다. 그는 모든 책을 다 정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사한 패턴을 확인하게 된다. 항상 바쁘게 생활하기 때문에 평소에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새벽에 일어나서 자기만의 시간들을 갖는 경우가 많다. 디즈니의 CEO 였던 밥 아이거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들의 공통점 중 2가지, 매일신문을 보면서 세상의 흐름을 읽는다. 그리고 꾸준히 책을 보면서 지식을 계속 업데이트한다.


책을 읽다 보니 결국 성공한 사람들은 막대한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노력들의 과정과 결과물을 알고 있는데, 어찌 신문과 책을 보지 않겠나?


매일 책을 보면서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 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자신에게 절박하고 자신이 갈망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범수는 2006년 말에 아이위랩을 만들었다. 창업하고 김범수는 1년 안식년을 가진다. 해외에 나가 있는 가족들을 설득해서 1년 동안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기로 한다. 네 식구가 함께 당구 치고, pc방에 가서 게임도 했다.


해외여행도 가고 국내도 갔다. 제주도 올레길을 무작정 걸을 때 폭우가 쏟아지고 덜덜 떨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고생을 이겨낸 성취감에 네 식구는 서로 얼싸안고 소리를 질렀다. 제주 올레길 여행은 네 식구 모두에게 좋은 추억거리가 됐다.


회사를 창업하자마자 1년을 안식년을 가진다는 게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다. 생각해보면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니 한게임을 성공시키고, 카카오를 성공시켰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놀라게 할 깜짝 아이디어는 없다

김범수는 창업하고 카카오톡 이전에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나, 모두 실패의 쓴맛을 봤다.


김범수는 아이위랩의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봤다. 한게임과 NHN을 경험해본 김범수가 보기에 아이위랩에는 회사 규모에 비해 기술자가 넘쳐났다. 아이위랩은 최고 기술자들이 모여 만든 회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자는 부족했다. 기획자가 없다 보니 서비스에 약점을 드러냈다.


김범수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기술력은 풍부하고 기획력이 약한 회사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물론 돈을 들여서 단숨에 좋은 기획자를 데려오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획자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기획이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분야에 대한 오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김범수는 회사 내부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미 회사 내부에서는 대여섯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그중 일부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아이폰이 몰고 올 스마트폰 모바일 시대의 혁명에 발맞춘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주요 개발자들을 3개 팀으로 나눴다. 각 팀은 팀장이 팀원을 꾸려 자체적으로 기획을 내서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앱을 만들도록 했다. 기한은 두 달이었다.


그가 이런 계획을 하고 지시를 내리게 된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엄청난 아이디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IT 종사자들처럼 기발한 아이디어에 목말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김범수가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깜짝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똑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찾으려 했다. 그의 다른 관점론은 개발 과정에 그대로 적용됐다.


김범수는 인터넷 시대나 모바일 시대가 열렸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지금껏 없던 욕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가장 잘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서 승부가 날 것이라고 봤다.


김범수가 생각할 때 스마트폰이야말로 사람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최초의 시기였다. 그는 인터넷 시대에는 검색이 중요했다면 모바일 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메신저였다. 카카오톡의 발상은 여기서 시작됐다.


사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카카오톡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현상이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는 것, 즉 다르게 보기와 결정하기가 김범수의 비결이다.


3개의 앱이 출시된 지 두 달도 안돼서 카카오톡이 5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한다.


당시 이미 선발주자들이 있었다. 왓츠앱이나 엠앤톡이었다.  엠앤톡은 서비스가 불안정했다. 에러가 자주 일어나니 사람들이 잘 쓰지 않았다. 카카오톡이 나오면서 다운로드 건수가 줄어들었다. 무료 서비스 모델로 가면 엄청난 양의 트래픽을 감당해내야 한다. 이점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카카오톡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카카오톡조차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쓰고 이렇게 많은 트래픽이 발생할 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 대비하고 있다가 닥치는 것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태에서 당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카카오톡은 서비스 안정화에서 앞서 나갔다. UI도 차별화했다. 단순하면서 깔끔하게 로딩 화면을 구성했다.

노란색과 검은색만 사용했다. 색깔로 앱을 규정한 경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카카오수다, 카카오 아지트, 카카오톡 중에서 카카오톡으로 힘을 집중했다. 나머지 2개의 서비스는 중단했다.


카카오톡이 출시된 지 8개월여 만에 사용자가 5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급성장하자 내부에서는 수익 모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김범수는 아직 수익 수익 모델을 고민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0여 년 전 한게임 유료화를 추진할 때와 반대 상황이었다. 그때 직원들은 한게임을 유료화하면 곧 망할지도 모른다며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김범수는 유료화할 만큼 가치 있는 방식을 선보이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10년 전 한게임 유료화를 밀어붙였던 김범수는 이제 달라져 있었다. 그때처럼 밀어붙이지 않았다. 직원들과 수익 모델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는 주로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예전과 다르게 김범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우선 다른 의견을 들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듣다 보면 서로 의견이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비슷한 부분도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두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고 토론을 시작하면 구성원들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이 도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카카오톡은 전 국민이 사용하고 그 이후 한참 후에야 광고를 적용했다. 전 국민이 완전하게 카카오톡에 적응하고 종속된 후에 유료화를 진행한 것이다.


김범수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첫째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공감하는 것은 모든 조직을 이끄는 사람의 기본이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 리더는 리더라고 할 수 없다. 김범수는 자꾸 이래라저래라 말을 하는 것보다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서야 결정을 할 수 있다. 문제가 없는데 어떻게 답을 낼 수 있을까?


셋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리더는 최악의 리더다. 듣는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 듣고, 토론하고, 수렴할 수는 없다. 김범수는 리더십 역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긴박한 상황에서 리더의 결단력이 빛을 발한다고 본다. 반드시 긴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리더의 결단이 중요한 순간은 얼마든지 있다. 결국 리더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게 그의 리더십에 대한 기준이다.




김범수는 서울대 출신이지만 그가 금수저여서 서울대생이 된 게 아니었다. 스스로 혈서까지 써가면서 바닥에서 올라왔다. 한게임을 성공시킨 것도 그가 집을 담보로 PC방을 차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 모든 걸 걸고 사업에 임했다. NHN에서 나올 때도 이미 경제적 자유를 이룬 상태였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 시대에서 모바일 시대로의 트렌트 변화를 읽어내고 지금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카카오톡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인생을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그 운도 잡을 수 있었다.


2010년 초반에 카카오는 늘어나는 사용자 때문에 매년 몇백억씩 적자를 보던 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가 망할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때 텐센트는 카카오에 투자를 진행한다. 지금에야 카카오가 대기업이 됐으니까 아는 거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유일하게 텐센트가 알아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텐센트는 카카오톡을 모방해서 만든 위챗으로 대박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카카오톡이 잘 될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래로 유학을 다녀온 셈이다.


그런 면에서 카카오는 아픈 손가락이다. 전 국민이 쓰면서도 심지어 카카오 직원조차도 초기에 주식들을 대량 매도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쓰고 좋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주식은 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카카오에 장기 투자하면서 인생을 바꾸기도 했다.


내가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을 읽는 이유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적자에 현혹되어 기업의 본질적인 경쟁력을 간과하고 있었다. 김범수라는 뛰어난 경영자도 알아보지 못했다. 책을 보지 않고 어떻게 이런 기업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2012년에 책이 출간되고 5년 후 카카오는 상장됐다. 기회는 평소 준비된 자에게 오는 법이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책이 투자에 도움이 안 된다고? 시리즈 - 1

https://brunch.co.kr/@1532b33dfd6b438/3


소노반 독서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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