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시나브로 나아진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났다.
운전은 나 혼자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더니.
오후에 약속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차를 정차해놓았는데 반대편에서 오던 차와 추돌사고가 났다.
예전 같았으면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올해 생각지도 못한 우울증으로 일상이 무너졌을 때부터였을까?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진리를 이제야 몸소 터득했다.
처음에는 놀랐다. 한문철의 블랙박스에서나 볼법한 상대 차량의 과감한 운전실력을 눈앞에서 직관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를 갓길에 댄 뒤에 보험사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생각보다 담담했다. 서로 보험처리를 하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 차는 고치면 되고, 더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감사하다'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사고로 몸이 크게 다쳤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재활에 성공하고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방송을 보면서 생각했다.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극복할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생각했다. '그런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참 오만한 생각이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나만 조심한다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데 말이다.
물론 '언제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불안해하면서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가 누린 무탈한 일상은 나의 노력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가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매일 아침 '감사해야' 할 일이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감사'였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선생님이 늘 강조하던 '감사하기'는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번은 상담을 하다가 선생님께 울부짖은 적도 있다.
'좋은 건 알겠는데. 감사가 안 되는 걸 어떡해요!'
소중한 일상에 만족할 줄도 모르고, 인생의 작은 행복도 발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싫었다.
억지로 감사일기를 며칠 동안 쓰다가 지쳐 그마저도 포기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교통사고를 겪은 날 '많이 다치지 않아서 감사'할 수 있게 되다니...!
평생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안개처럼 나를 감싸던 우울증은 시나브로 나아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정말 감사하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 사진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