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지 Jun 12. 2023

[진지의 업템포] 이브, 프시케, 푸른수염의 아내

르세라핌 <UNFORGIVEN> 앨범에 담긴 수록곡, 너무 좋잖아?


Tempo 1.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수록된  앨범 자켓. HYBE 제공.


멜론 차트에서 르세라핌의 이 곡 제목을 본 건 지난주의 일이었다. 멜론 메인에 들어가면 TOP100 차트 중에서도 TOP10에 상위 랭크되어 있는 곡들이 노출되어있다. 지난 주(2023년 6월 첫째 주) 처음으로 이 곡이 TOP 10에 진입했다. 1위부터 3위를 차지하고 있는 '퀸카', 'Spicy', 'I AM' 같은 단출한 제목 사이로 장황하게 펼쳐진 이 곡의 제목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UNFORGIVEN' 외 이번 르세라핌 앨범 수록 곡을 자세히 들어보지 않았던 나는 호기심에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웬걸, 좋았다. 힙하기 그지없었다. 빠져버렸다. 무한 반복해 들었다.


Tempo 2. 'I'm a mess, mess, mess, mess...'


르세라핌의 멤버 허윤진이 썼다는 이 후렴구는 단출하다. 처음부터 'mess'를 반복적으로 읊조린다. 음계를 빼고 내레이션처럼 반복적으로 한 단어만 외친다. 빠른 템포의 간결함과 더불어 귀에 꽂힌다. 춤동작이 그려진다. '음악방송을 했다면 무대가 정말 멋있었을텐데'라며 유튜브를 찾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최근 음악방송을 했다. 무대 영상이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 트위터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어 이 곡이 차트 상위에 진입했다. 르세라핌의 이 곡 무대는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다. 'I'm fearless'를 재배치해 작명한 '르세라핌(lesserafim)' 팀명처럼 두려움이 없는 소녀들의 과감한 움직임이 돋보였다. 메인 타이틀곡 'UNFORGIVEN'에 이어 이 곡을 커플링곡으로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LE SSERAFIM(르세라핌) -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4K) | LE SSERAFIM COMEBACKSHOW | Mnet


Tempo 3. 노래를 실컷 듣고 나니, 곡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해졌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라니. 덕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계관'아닌가. 너무나 그 세계관을 알고 싶어지게 하는 제목이다. '이브'가 내가 아는 그 이브가 맞는지, 프시케와 푸른 수염의 아내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봤다.


Tempo 4. '이브, 프시케, 푸른 수염의 아내' 공통점은 금기를 넘어선 그녀들이라는 점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고 했지만 기어코 열어보고야 마는, 호기심에 용기를 내어버린 바로 그 존재들 말이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이브는 선악과를 먹었고, 프시케는 에로스의 얼굴을 봤으며, 푸른 수염의 아내는 비밀의 방을 열어 남편이 죽인 시체들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이브 (우측),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우측). Wikipedia 제공.


Tempo 5. 이브는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브는 뱀의 유혹과 더불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을 갖고 싶은 욕망을 떨치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에게도 권했다. 나눠먹었다. 이로 인해 아담과 이브는 원죄의식을 지닌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이브는 이 일을 계기로 출산의 고통이 배가 되는 등의 저주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Tempo  6. 프시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빼어난 미모의 '인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점이다. 프시케의 미모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사람들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의 신전을 찾는 대신 인간 프시케를 추앙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질투심을 갖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인 에로스를 시켜 프시케에게 저주를 내리라고 했다. 하지만 에로스마저 프시케를 만나러 갔다가 프시케에게 반한다.


Tempo 7. 이 일이 있은 후 프시케는 신탁되었고 신의 뜻대로 어둠 속에서 남편을 만나게 된다. 남편은 프시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지만, 끝내 얼굴을 공개하진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사라질 것이라고 프시케에게 경고했다.


프시케는 가족 중 언니들의 질투를 샀고, 언니들은 남편의 얼굴을 몰래 보라고 종용했다. 프시케는 결국 얼굴을 봤고, 남편은 사라졌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남편은 사실 에로스였다. 프시케는 남편 에로스를 찾아 헤매는 불행한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  


Tempo 8. 마지막으로, 푸른 수염의 아내는 17세기 동화이다. 가장 유명한 판본은 샤를 페로 버전이다. 오펜바흐는 이 작품을 '부르주와의 사랑 없는 결혼'을 비판하고자 오페라화 시키기도 했다. 서양에서 '푸른 수염'은 막장 남편을 상징한다. 푸른 수염은 여러 차례 결혼을 했으나, 그 때마다 아내가 실종되어 끝난 수상한 귀족이다. 푸른 수염은 마지막 아내에게 열쇠를 주며 '이 방만은 열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푸른 수염의 아내 역시 언니의 종용에 못 이겨 방문을 열고야 만다. 그 안에는 남편인 푸른 수염이 죽인 아내들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푸른수염은 아내가 방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오빠들의 도움으로 구출된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tvN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도 등장했다.)


[동화zip]03. 푸른 수염의 비밀 | 사이코지만 괜찮아 EP.420


Tempo 9.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든 아니든, 금지된 것들을 탐했다가 화를 입은 여성들의 내용이다. 르세라핌 노래 가사에 보면 '볼 거야 금지된 걸'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직관적으로 곡 서사 전반을 아우른다. 돌려 말하는 법 없이 '보지 말라 보고파 날 둘러싼 이 금기들 / 그 날의 이브처럼'이라는 가사도 나온다. 이것들을 엮어서 복잡하게 넣는 대신, 상징을 던져주고 '금지된 것에 도전한다'는 뉘앙스만 불러일으키는 구성이다. 뮤직비디오 역시 그러하다.


LESSERAFIM (르세라핌)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OFFICIAL M/V


Tempo 10.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뮤직비디오에는 1791년 벤자민 웨스트의 '아담과 이브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the Expulsion of Adam and Eve from Paradise, 1791.)이라는 그림이 등장한다. 선악과를 상징하는 사과도 등장한다. 이 사과에는 프시케의 남편인 에로스(로마 신화에서 큐피드)의 화살도 꽂혀있다. 뮤직비디오 전반에 ''이 거듭 등장하고, 르세라핌이 그 안에서 춤을 춘다. 이 문을 누군가가 거듭 두드리는 장면도 나온다. 문과 대치되는 바깥 공간에는 스케이트를 입은 소년들이 르세라핌을 추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이 결국 열리는 순간, 푸른 수염의 아내가 문을 열고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이 곡의 주요 메시지가 담긴 후렴구가 터져나온다.


'I'm a mess in distress (나는 고통 속에 엉망이야) / but we're still the best dressed (하지만 여전히 가장 잘 차려입었지) / Fearless, say yes (겁이 없어, 맞아) / We don't dress to impress (우리는 남에게 잘 보이려고 입는 게 아냐)'


'아담과 이브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the Expulsion of Adam and Eve from Paradise, 1791.) 장면. HYBE 제공.


선악과를 상징하는 사과와 에로스(큐피드)의 화살. HYBE 제공.


푸른 수염의 아내 이야기에 등장하는 '문'이 거듭 등장한다. HYBE 제공.


I WON'T HIDE MYSELF 라는 메시지. HYBE 제공.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장면에 등장하는 '약속'의 상징인 손가락 사슬을 멤버가 끊는 장면이 나온다. 금기를 깸. HYBE 제공.


Tempo 11. 결국 외부의 시선에도 깨지지 않을 단단함을 노래한 'Antifragile'과, 금기를 겨누고 한계를 넘어 같이 가자는 'UNFORGIVEN'에 이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태도로 금기를 깬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까지. 르세라핌은 자존감을 노래하고 있다. '인형이 아니다, 찡그린대도 그것도 나야'라는 이번 노래 가사처럼, 정확히 말하면 '글자 그대로의 금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 금기시 되는 것들, 비합리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도전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다. 방탄소년단이 헤르만헤세 '데미안' 성장 서사에서 착안한 <화양연화> 앨범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끌었다면, 르세라핌은 이번 곡의 상징이 모두 여성 캐릭터인만큼 '여성 성장 서사'에 핀셋처럼 집중하는 모양새다. 아이돌 음악은 여전히 십대들이 많이 듣는 만큼, 방탄소년단에 이어 또 한 번 건강한 성장 세계관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기대한다. '이브', '프시케', '푸른 수염의 아내'는 거들뿐, 중요한 건 '성장'이었다. 


르세라핌의 겁없는 성장을 응원합니다. 르세라핌 로고. HYBE 제공.


음악평론가 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