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 리스닝룸 | #1.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조도 : 5룩스 / 습도 : 산뜻함 / BG : 주혜린 Busy Boy

by 이예진

‘산뜻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이 말인즉슨 축축하지 않은 상태다. 감정에 젖어 있지 않은 상태. 최강록 셰프가 ‘조림 인간’이듯, 나는 ‘감수성 인간’이다. 음악 하나, 문장 한 줄에 쉽게 붙잡히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감정이 없는 사람인 척 나를 말린다. 음악과 글쓰기는 감정을 풀기보다는 흘려보내는 쪽에 가깝다. 그렇게 몇 번의 사이클이 돌다 보니 문득 이유를 묻게 된다.


산뜻함이 유지되지 않는 날들은 대개 환경의 문제다. 누군가의 위선과 그로 인해 비추어 보는 나의 가식. 타인의 감정과 거기서 파생되는 나의 반응들.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찬 내 머릿속을 알 리 없는 상대방은 이렇게 말한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해?’


서울 지하철역. (c) iStock

그냥 내게 와서 쉬라고 말하는 주혜린의 ‘Busy Boy’ 가사 속 인물처럼, 이제는 내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그런 상태에는 보사노바가 제격이다. 슬픔과 밝음 사이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리듬. 그 적당한 템포와 안도감은 조도가 낮은 리스닝룸에서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긴장도를 낮춘다.


주혜린, <Stereo>(2025) 수록곡 ‘Busy Boy’ (c) Youtube

보사노바는 사실 리듬이 전부다. 그래서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와닿는다. 이소라의 ‘청혼’ 도입부를 떠올려보면 된다. ‘쿵따다 쿵따, 쿵따다 쿵따.’ 발상지인 이파네마 해변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Wave> 같은 앨범이 어떤 분위기이기에 오래 남았는지 그 리듬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삶의 호흡을 잠시 바꾸고 싶을 때 이 리듬이 먼저 떠오른다.


바다. (c) chatGPT

처음 보사노바를 좋아하게 된 계기에는 임경선 작가의 취향이 있었다. 라디오 고정 코너의 BGM은 ‘Tristeza(슬픔이여 안녕)’였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마치 쨍쨍한 야외 공간에 빨래를 널어 말리듯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코너의 말미에 추천되던 ‘I wish you love’와 같은 곡들은 이십 대 초반의 정서를 오래 붙잡고 있었다. 그 앨범은 지금도 어느 시절의 공기를 그대로 데려온다.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 (Astrud Gilberto) 'Tristeza' (c) youtube

이런 내 인생의 릴렉스 된 기억들은 대체로 보사노바의 호흡을 닮았다. 요즘 이와 비슷한 온도의 음악을 들을 때면 이유 없이 반갑다. 누군가 내게 요즘 한국인의 정서는 블랙핑크의 ‘뛰어’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로 하루를 통과하고 있다. 네이버 앱으로 지하철 도착 시간을 확인하고 전력 질주한다. 출근길에 사람을 가득 싣고도 미처 타지 못한 채,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나 자신을 마주한다. 매일 목적지를 향해 밀려가는 사람들 속에 섞인다. 대부분은 표정이 없다.


블랙핑크, ‘뛰어(JUMP)' Clip. (c) Youtube

이 리듬은 일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터지는 사건과 사고, 가십과 트렌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것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벅차다. SNS를 하지 않으면 대화에서 쉽게 밀려난다. 퇴근 후에는 자기 계발을 해야 하고, 주말에는 못다 한 계획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돌린다. 모두가 바쁜 이유를 계산하듯 살아간다. 잠시 멈추기만 해도 곧바로 뒤처질 것 같은 기분이 일상을 덮는다.


조도 5룩스의 방. (c) pinterest

이런 와중에 매일 챙겨 듣는 신보들 가운데 주혜린 같은 아티스트의 음반을 들으면 유난히 반갑다. 그의 음악은 감각적이다. 최근 세 장의 앨범을 거치며 이 음악의 결은 더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자기 속도를 잃지 않고 있다는 인상이 남는다. 다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이다. 결국 감수성 인간이 살아남는 방법은, 언제 말려야 하는지를 아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쪽이 맞다. 지나친 진심은 때로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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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projectjinj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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