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추석을 두 주 앞두고 사촌들이 모여 고향 선산 벌초를 한다. 사실 선산이라 해봐야 조부모님과 어머님, 작은어머님 이렇게 네 분의 조상이 모셔있는 단출한 곳이다.
지역으로는 거침없는 산세와 물이 흐르는 강원도 양양. 예전 속초 비행장이 있던 뒷산으로 우리 가족들의 가산은 힘차게 뻗어내려 바다로 향하는 마지막에 있다. 작은 아버님 말씀으로옛날에는 그곳이 동경사 군인들의 사격장으로 우리 산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했으니 그렇게 산전수전 다져진 든든함에 작은 산이지만 당차게 서있는 것 같다.
9월의 첫날 진득한 늦더위에 사촌들과 부지런히 벌초를 한다. 낫은 들었지만 흉내로 거들뿐 산소를 덮은 칡덩굴과 쑥부리들을 뽑아내고 나면 두 동생들이 걸쳐만 예초기 두대의 굉음이 벌초의 난장을 산뜻하게 마무리한다.
사실 나에게는 벌초의 즐거움이 따로 있다. 조상님의 문안은 당연하지만 벌초가 끝난 다음 근처 온천에 가서 몸을 담그는 즐거움과 저녁때 친지들과 회포를 푸는 정겨움 그것이다.
이번에도 기계의 덕분으로 일찍 마무리하고 늘 그랬듯이 고향 막국수로 점심을 하고는 날개 다친 학이 땅속 더운 기운을 쐬고 낳았다는 전설의척산온천으로 달려가 몸을 담갔다. 느긋함에 눈을 감고 그 학이 되어보는 신선놀음을 했다. 그렇게 온갖 잡다함을 다 씻어버리고 나왔는데도 아직 오후 3시. 사촌들과 약속된 동명항에서의 저녁식사 시간은 아직 많이 이르다. 콘도에 잠시 여장을 풀고 그대로 있기가 아까워 바다로 향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영금정(靈琴亭). 원래 정자는 이곳이 아니라 하지만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거대하다. 기둥을 붙잡고 수평선 너머 대양을 바라보며 희망을 이야기했고 밀려오는 파도의 강렬함 파편에 쓸데없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큰 호흡으로 마무리할 즈음 누군가 등을 두드린다. 사진을 부탁하시는 남루하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다정한 부부. 그렇잖아도 오던 길에 보았던 다리가 불편하신 남자와 손잡고 걸으며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던 부부를 기억하고 있던 참이다. 반갑게 흔쾌히 사진을 몇 장 찍어 드렸다. 뭉클했던 감정을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에 넣어 드렸다.
기분도 우쭐하여 내친김에 동명항 등대 쪽으로 길게 뻗은 뚝 위로 걸어가다 잠시 멈칫했다.
이 절묘함이란.
정적이 흐르더니 대양의 힘으로 이끄는 다급한 바다의 손짓과 서쪽으로 넘어가는 애달픈 태양의 아슬한 균형에 서서 우주가 이끄는 나를 인식하게 되었고그렇게 지금을 알아차리며 한참을 서 있었다.
드디어 왁자지껄 함께 모인 '동명항 81호'가 선택해 준 저녁 식사는 대단했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회로 가득한 바다 내음이 즐겁고 오고 가는 친지들의 경사도 짭조름하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쌍둥이를 잉태한, 어렵다던 취직에 성공한, 또 결혼을 앞둔 아이들 모두의 앞날에 건배를 하였고 어른들과 우리들의 건강한 삶도 기원했다.
그렇게 이번 벌초를 마치며 얻은 가르침을 귀중하게 마음에 담고 돌아왔다.
산다는 것은,
거대한 우주의 힘에 따르며 그곳에 나를 맡기고 지금 순간을 당당하게 나아가면 된다. 그것을 운이라 부를 것이다. 그래서 만일 지금 가만히 있다면 죽음의 기도를 하고 있을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