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 불안, 그리고 희망
정년퇴직을 1년 앞둔 신중년의 직장인, 그 마음은 어떨까?
나는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로, 이제 곧 수많은 퇴직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몇 년 전부터 TV 다큐나 유튜브에서는 은퇴자의 애잔한 사연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은퇴 준비를 제대로 못해서 방황하는 이야기, 새로운 일에 도전하다 꺾이고 좌절하는 실패담, 눈높이를 낮춰서 재취업에 성공하는 분투기, 퇴직 후 부부 역할 변화에 따른 갈등 등.
나도 모르게 인생 2막에 연착륙하지 못한 주인공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게 된다.
'이거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일 수 있잖아.'
정년퇴직을 1년 앞둔 지금, 복잡한 심경을 정리해 본다.
나를 돌아보고, 호흡 가다듬고,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크다.
90년대 IMF와 2000년대 외환위기, 그리고 글로벌 불황의 파도를 건너면서 정년까지 온 건 행운이자 축복이다. 동기들 중 상당수는 50대 중후반에 회사를 떠났다.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 이름으로 직장생활을 아쉽게 끝낸 친구들이 많다. 정부공공기관과 대학에서 근무하는 친구들 외에는 사기업에서 만 60세까지 일하기 쉽지 않다. 끝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평균수명과 기대여명이 빠르게 늘어나고, 100세 시대에 진입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제 60세 이후에도 30~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불과 5~10년 상간에 이런 상황이 우리 눈앞에 짜잔하면서 펼쳐졌다. 개인과 사회가 미처 준비하고 대비할 겨를 없이.
자산과 연금이 충분한 경우는 괜찮겠지만, 대부분 은퇴자들은 빠듯한 국민연금과 약간의 퇴직금을 받아 들고 긴 여생을 버텨야 한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희망이라기보다 불안의 그림자로 다가오는 이유다.
업무 권한과 결재권(인사, 예산권 등)을 내려놓으면서 회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걸 절감한다. 부하직원들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그들이 잘하기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가네', 마음 한편에 씁쓸함이 있다.
명함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33년 동안 '회사 사람'으로 살아왔고, 조직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 앞으로 직책과 명함이 사라지면 내 존재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때로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조언도 하고 싶지만 '괜히 나서지 말자. 부작용 생긴다'라며 스스로 제어한다. 이제는 남은 기간 동안 뒤에서 조용히 돕는 게 최선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자신감도 비례해서 줄어든다. '퇴직'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마음이 심란해지다. 원래 신경이 무딘 편이지만 요즘은 잠을 설칠 때도 많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흰머리와 주름, 빠져가는 머리카락은 거울 속 내 모습을 낯설게 한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서 있는 자화상처럼.
예전에는 회의에서 내가 내린 결정 하나가 부서나 회사의 성패를 좌우했지만 이젠 후배들이 중심이 되고 나는 조언자 역할로 물러난다. 회의에 참석하더라도 굳이 나서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지만 내면의 자존감은 조금 흔들리고 있다.
은퇴 후 수입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홑벌이라서 부담이 더 크다. 자녀 결혼, 치솟는 집값, 부모로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국민연금과 퇴직금은 빠듯하고 우리 부부는 어쩌면 100세까지 살아야 하니까. 아내는 120세까지 살 수도 있고. 노후에 자녀에게 부담을 주어서도 안 되고. 자녀를 지금 도와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중에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경제적 불안만 있는 건 아니다. '삶의 방향'에 대한 불안도 있다. 앞으로 회사 밖에서 인생 2막을 무얼 하면서 재미있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불안도 크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체력은 버텨줄까?" 회사라는 울타리 밖은 낯설고, 새로운 길은 두렵다.
"80세 이후의 인생에 대해서는 왜 노후준비를 하지 않느냐."
"나이 들어서 적은 돈이나 폼 안 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청년들이 꺼리는 일도 기꺼이 하라."
은퇴 전문가인 강창희 대표의 충고다. 70대 중반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그분 조언이 떠오른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 60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기가 될 것이다!
요즘 60대는 예전에 비하면 훨씬 젊고 건강하다. 이제 60대를 노년이라고 부르지 않고 초로 또는 신중년이라고 한다. 액티브 시니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나는 중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퇴직하면 소중한 '자유'를 얻는다. 회사의 지시와 눈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시간을 설계할 수 있다. 평일에 등산객 북적이지 않는 산을 조용히 오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다. 106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 말씀이다. “돌이켜보면 60대가 인생의 황금기였다.” 가족 부양의 짐은 덜고, 건강은 아직 허락되며, 조직의 구속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유인!!
나는 남은 1년을 ‘허송세월’이 아닌 준비의 시간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후배들을 돕고, 회사에 기여하면서도 동시에 인생 후반전을 위한 역량을 기르는 데 집중하려 한다. 사내 강연, 사내 경영정보 뉴스레터 발간, 신사업 조직 지원,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만 60세가 되는 날, 직장인을 위한 자기 계발서를 출간하려고 한다.
잘 찾아보면 개인의 역량 계발에도 도움이 되고 회사에도 필요한 일들이 많이 있다. 개인의 주특기와 경력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겠지만 정년퇴직할 즈음이 되면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 상태다.
정년퇴직까지 남은 1년. 퇴사 생각하면서 불안해하기보다 인생 후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알차게 전진하자. 손 놓고 있는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가버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람에겐 인생을 전환하는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 이 글은 제가 4년 전, 그러니까 정년퇴직을 1년 정도 앞둔 시기에 쓴 글입니다. 그런데 운 좋게 아직 같은 회사에 고문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대비를 했던 게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