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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용 May 14. 2023

화가와 과학자(2)

미술사에서 과학과 비슷한 면을 가진 또 다른 그림들이 있다. 세상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데에 집중한 미술사조로, 사실주의라고 불린다. 사실주의가 갖는 핵심적인 목표 중 하나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해내는 데에 있다. 사실주의의 대표주자인 귀스타프 쿠르베는 아름답고 고상한 것들을 주로 그리던 이전의 미술과는 달리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성 또한 찬란함보다는 투박함과 비참함에 가까웠다. 이런 화풍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이전의 미술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장점이 있었다. 바로 사실감이다. 쿠르베의 그림에 대해 에드가 드가는 그의 그림에 대해 마치 송아지의 젖은 털에 코를 갖다댄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가 그린 그림이 이상이나 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점점 늘어났고, 결국 미술의 중요한 한 갈래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모습을 든 사실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발전했다.


귀스타프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이렇게 발전한 그림의 사실성은 극사실주의로 이어졌다. 극사실주의의 그림들은 우리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다. 이 그림들은 일단 사진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그렸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 이런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놀랍지만 한편으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대체 이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진과 똑같이 그리는 것을 과연 독창적인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림을 보다보면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왜인지 현실을 보는 것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일단 사진과 같은 물감을 쓸 수가 없기에 사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과 완전히 같은 질감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과도 완전히 같지 않다. 그러다보니 채도나 질감 같은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우리가 현실의 대상에서 느끼는 것과는 어떤 이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사진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슥 하고 지나가버려 포착할 수 없었을 현실의 한 장면을 우리는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마루오 다비드 <크리스탈 식기와 메론>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이런 그림들을 순간에 관한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명백함의 예술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지나가버렸을 모습들이 이렇게 명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화가는 그 순간에서 어떤 특징을 살려 명확한 순간의 감각을 전달할지 정해야 할 것이다. 극사실주의 대표적인 특징인 순간과 명백함은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사실을 표현하는 데에 정말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과학의 목적 중 하나가 세상을 정확히 표현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과학은 확실히 사실주의 계열의 미술을 닮았다.


과학이 한 현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어떤 순간을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순간은 무한히 짧다. 그래서 순간순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한히 정확한 시계와 그 짧은 매 시간간격마다 현상을 그려낼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순간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림으로 현실을 완전히 똑같이 그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뉴턴이라는 과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뉴턴의 초상화


뉴턴은 행성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뉴턴은 데카르트와 같은 선배들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데카르트는 세상의 물체를 몇 가지 간단한 개념으로 표현하려 했다. 세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에 있어 물체의 위치와 다음 위치를 정해줄 속력 정도만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정한 것이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의 화폭에 행성을 점으로 표현하고 그 각 순간의 속도를 알고 싶었다. 속도를 바탕으로 위치들을 이어서 하나의 선, 궤적을 그리면 행성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행성의 운동 방향을 시시각각 바뀌었다. 어떤 특정 순간의 행성의 위치와 속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무한히 정밀하게 나누어야 했다. 놀랍게도 뉴턴은 고민 끝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을 짧은 순간으로 나누는 대신 시간을 적당히 나누었다. 그리고 좀 더 정밀하게 시간을 다시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더 정밀하게 나누었다. 이렇게 나누다보면 생기는 변화에 규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규칙을 찾으면 직접 무한히 나누는 수고 없이 원하는 순간의 속도를 알 수 있었다. 여기에서 과학과 미술의 중요한 차이가 나타난다. 바로 미술은 시각의 표현이 핵심인 반면 과학은 그 규칙의 발견이 핵심이 된 것이다.


왼쪽 사진: 공이 떨어질 때 매 순간의 위치, 오른쪽 사진: 태양계를 지나는 한 혜성의 궤도


과학에서 일종의 극사실주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과학은 당연히 세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던 그 이전과 그 이후로 구별될 수 밖에 없었다. 뉴턴의 이러한 발견을 미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발견된 규칙은 미분방정식이라 불린다. 뉴턴은 이것을 통해 행성, 더 나아가서는 모든 물체의 움직에 관한 규칙을 찾는다. 바로 뉴턴의 운동법칙이다.


이제 미분을 통해 순간을 더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우리가 극사실주의 그림 앞에 서서 물체의 특징을 가만히 살펴보는 것처럼 미분 또한 세상을 보고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둘 모두 우리가 흘려보내는 순간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준다. 어쩌면 이렇게 어느 순간을 유심히 들여다 보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현재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순간은 한편으론 나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때론 나무를 넘어 숲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숲을 이해할 때 나무 또한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과학의 모습은 순간 순간의 규칙과 사실, 미분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과학의 진짜 모습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적분이다. 








표지 사진: 귀스타프 쿠르베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혜성궤도 사진: L. M. Karim, et. al., 2011, Journal of College of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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