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고민 끝에 데카르트는 역사적인 선언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지금 생각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확실한 존재라는 것이다. 바깥에서 찾던 정답을 바로 자신에게서 찾은 순간. 천장과 파리가 아닌 데카르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객관성 위에 주관성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관성 위에 객관성을 구현해내는 것. 자신만의 방식에 의지하여 바깥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주관성과 객관성, 달리 말해 생각하는 존재와 외부의 물질적 세계를 나누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은 마음과 물질은 다르다는 심신이원론으로 이어졌다. 그는 바깥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모습 대신 마음으로 꿰뚫어본 세계를 본질로 여겼다. 눈을 감으면 상상할 수 있는 방대한 공간이, 바로 물체들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물체는 세상의 본질인 공간이 연장(extension)하여 나타난 모습에 불과했다.
데카르트는 물체를 길이, 넓이, 깊이라는 세 가지 성질로 정의했다. 이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운다면 우리가 어떤 물체를 놓든 길이, 넓이, 깊이를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의 눈금으로 가득 찬 격자 세계인 좌표가 갖는 의미다. 좌표 위에서 세상의 모든 물체는 파악될 수 있다. 더 이상 물체가 숨긴 비밀스러운 신비는 없었다. 차라리 그런 신비는 물체가 아닌 물체를 파악하는 정신적인 존재, 우리에게 있는 것이었다.
좌표에서 보듯 데카르트의 철학은 수학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의 근본인 “나는 존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논리적 증명이라기 보단 직관에 기반한 선언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의 보편적인 원리를 확립하려 했던 바람과 달리 그의 근본 원리에 대해 여러 반론이 존재한다. 게다가 오로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둔 탓에 독단이나 이성의 맹신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세계대전과 같은 근대의 부정적인 사건들로 이어졌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독단적으로 활용되어 오용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그의 철학이 독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을 거부하고 다른 가치를 부정하는 독단과 외부의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는 것은 분명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그저 혼란한 시기 속에서 휘둘리는 대신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자신의 철학과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데카르트의 방식과 태도는 근대 과학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과학의 방법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 결과 역사 속 과학은 '사실'이라고 알려진 내용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방식을 관철해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끊임없이 혼란한 상황을 만난다. 때로는 객관적이라고 불리는 과학, 당위, 정답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틀렸음을 강요 받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일지라도 그 권위에 자신을 부정하는 대신 자신의 이성으로 스스로 판단해 나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과학 속에 녹아있는 진정한 과학의 본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