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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 Jul 15. 2022

우물 안 개구리 : 근시안적 사고

세상의 경계는 보이는 만큼, 아는 만큼.

대학교 1학년 시절까지 나는 교통카드를 따로 가지고 다녔다. 매번 필요한 금액만큼 충전해두고 교통카드를 사용하다가 충전액이 모두 소멸되면 다시 충전하기를 반복했다-한 번에 보통 3만 원 정도를 충전해두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방식을 이용하는 건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이 그렇게 하니까 모든 사람도 역시 같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교통카드 리더기는 카드를 인식시키면 위쪽에 카드 사용액, 아래쪽에 카드 잔액이 표시되게끔 설정되어 있는데, 나는 늘 아래쪽의 이 잔액 현황을 확인하며 카드를 충전해야 할지 여부를 판단했다.


줄을 서서 한 사람씩 버스에 탑승하던 스무 살의 어느 날이었다. 앞서 버스에 탑승한 직장인 차림의 중년 남성분이 리더기에 카드를 인식시키는 장면이 보였다. 잔액에 찍힌 금액이 무려 10만 원이 넘었는데, 당시 나에게 그 금액은 상당히 크게 다가왔다. ‘잔액이 10만 원이 넘으면 한 번 충전할 때 대체 얼마를 충전하는 거지?’란 생각에 역시 직장인은 씀씀이가 달라도 다르다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사실 워낙 거리가 있는 학교를 통학했으니 내가 한 달에 쓰는 교통비가 이미 10만 원을 훌쩍 넘겼을 때다. 하지만 일단 본인은 3만 원씩 충전하니 다른 사람도 그 정도 금액만 충전할 것이라 생각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후 앞에서 버스를 탑승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남몰래 탑승객의 카드 잔액 현황을 보는 데에 재미가 들렸다. 처음 충격을 준 중년의 남성분만큼 큰 금액을 잔액으로 둔 사람이 생각 외로 굉장히 많았고 그럴 때마다 통이 크신 분이라며 내적 감탄을 해댔다.


그러다 동기를 통해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로 교통카드를 대신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됐다. 늘 체크카드를 이용하면서도 교통카드는 별도로 가지고 다녔는데, 교통카드를 잃어버려 곤란하던 차였다. 체크카드에는 따로 충전해둔 교통비가 없는데 괜찮을까? 싶었는데 체크카드를 교통카드 리더기에 인식시키니 정말로 삑- 하고 처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신세계가 다 있나.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로 이용하는 교통비는 후불제라는 사실도 듣게 됐다. 정말로 체크카드를 교통카드로 사용할 때마다 이전 사용액이 합산되어 잔액이 표시됐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달 차쯤 마침내 교통비 합계액이 10만 원을 넘어섰을 때 깨달았다. 잔액이 10만 원이 넘던 통 크신 그분들이 실은 후불제 교통카드를 이용하고 계실 확률이 크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간 내가 얼마나 좁은 시야로 세상을 봤는지 알게 되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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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근시안적 시야와 사고를 확인한 계기는 이외에도 물론 무수히 많다.


예로, 나는 스무 살 이전까지 거의 바르고 선량한 친구들과 따뜻하고 현명하신 스승님들만 겪어온 터라 뉴스나 드라마에 나오는 악한 자들은 극소수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흔히 머릿속이 꽃밭이다-라고 표현하는 애의 전형이 바로 나였던 거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착하며 호의는 반드시 호의로 돌아온다고 믿었다가 수차례 얻어맞으며 사람과 사회를 배웠고 경계의 벽을 차차 올려 조금은 단단하고 매몰차진 지금의 내가 됐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후일 다뤄보겠다.-


또 스스로의 부족한 지식이나 몰지각으로 창피를 당할 뻔한 순간도 종종 있으나 지나치게 부끄러우니 이 부분은 눈 감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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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세상은 어릴 적보다야 훨씬 많은 것을 경험했고 알게 되었으므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로 나의 세상은 역시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커질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한할 것이며, 내가 구할 지식이나 진리, 지혜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지닌 선구자에게 있을 수도 있고, 나와 연배는 같으나 다른 삶을 걸어온 또래에게 있을 수도 있으며, 나보다 지나온 삶의 길이는 짧을 지라도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문물이나 환경을 겪으며 자라온 후대에게 있을 수도 있다.


타인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그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싶어지는 순간이 점차 많아진다. 정작 스스로에겐 한없이 관대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스스로가 얼마나 작고 부족한 존재인지 매번 되새기고 염두하고자 써본 다짐의 글을 이만 맺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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