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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양 Apr 21. 2022

비로소 고하는 피터팬과의 작별 (3)

외면하던 성숙과의 조우, 그리고 어른으로

루비와의 헤어짐은 놀라우리만치 허무하고 예상치 못하게 이루어졌는데, 사실 난 아직도 그 결말이 믿기지 않는다.


그날의 난 여느 날과 같이 루비를 보러 콧노래를 부르며 하굣길에 올랐다. 오늘은 또 루비와 무얼 하며 놀까 기쁜 상상의 나래에 몸을 맡기면서 말이다.


집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대문을 박차 루비에게 달려간 내가 마주한 것은 밥그릇만 덩그러니 놓인 텅 빈 고무대야였다.


고무대야 한 귀퉁이를 채우던 작은 몸뚱이는 어째서인지 보이질 않았고, 당혹스러운 마음에 정신없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리 찾아도 루비의 행방은 묘연했고 가슴에는 불현듯 불안감이 샘솟았다.


고양이의 사정을 알려주고 녀석들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던 할머님의 집으로 달려가 아기 고양이 어디 있냐고, 혹시 누가 데려가기라도 했냐고 취조라도 하듯 다급히 외쳤다.


“밤 사이에 고것이 도망을 갔어. 친구가 왔는지 쪼매난 둘이 서로 도와서 대야 밖을 나간 모양이야. 새벽에 어린 고양이 새끼들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침에 나와보니까 없어졌지 뭐야.”



믿을 수 없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부쩍 자라나긴 했지만 루비는 여전히 고무대야 높이보다 작았고 당연히 고무대야를 넘을 수 없었을 거다. 무엇보다 루비에겐 그 고무대야 안이 유일한 보금자리였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공호였다. -오롯이 내 관점이지만 틀림없이 실제로 그랬을 거라 난 굳게 믿었다.- 제 몸 가누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꼬물이 주제에 정말로 도망을 간 걸까? 다른 나쁜 고양이들이 해를 끼친 건 아닐까? 혹시 어미가 데려갔나?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루비의 형제를 데려간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친구네 문을 두드렸다. 루비가 없어졌다고. 도망갔다고. 그러자 놀라운 말이 들려왔다. 친구네 고양이도 밤 사이 없어졌다는 말. 루비와 함께 도망간 고양이가 바로 루비의 형제라는 추측이었다.


.

.


겨우 어른 손바닥 정도 크기로 자란 두 꼬마 고양이들이 정말 자의로 힘을 합쳐 집과 고무대야를 탈출하고 야생으로 돌아갔을까, 란 질문에 답을 하라면 여구히 의문이 남는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그게 진실이라면 루비는 겉모습이나 내 생각과 달리 그때 이미 어른이 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거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과 우유가 채워지고, 어여삐 여겨주는 동네 사람들과 신나게 놀다 보면 지나는 하루가 그저 대단히 만족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가족의 부재에서 오는 비애는 그렇게 즐겁게 살다 보면 자연히 기쁨으로 채워질 거라 단정 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했다. 루비는 원래 제 세상인 고무대야 바깥의 자유를 동경했고 사람이 아닌 진짜 가족을 그리워했나 보다. 그리고 결국 신체적 한계나 야생에서 겪을 위협 등의 난관에도 굴함 없이 자신이 바라는 세계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둘러싼 세계를 깨부술 용기, 이제야 조금씩 그것을 배워가는 입장에서 보자니 루비는 나의 인생 선배였다.


.

.


얼마 전, 엄마가 내게 넌지시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였으면 “이미 한참 전부터 어른이었거든요~”라고 가볍게 되받아쳤겠지만 쉬이 답변하지 못했다. 어쩐지 조금 머쓱해진 까닭이었다. 그동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이, 그래도 난 아직 어리지’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으나 나 스스로도 부쩍 자랐음을 느끼던 최근이었다.


단순히 선호하는 스타일의 변화나 조금은 냉철해진 성정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고,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던 것들에 닿기 위해 부딪칠 각오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단계인지라 완전함까진 한참 멀었다.-


(이를테면 전에는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모호하고 아득하게 잡던 일들을 시일 내에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과 대안을 구상하고 실천까지 행하게 되었다 등의 맥락이다.)



남들보다 오래 머물던 안정적인 둥지 안에서 드디어 날갯짓을 시작한 느낌이랄까.


자란 자신을 인정하면 더 이상 순진한 척 의존하며 지낼 수 없을 것만 같아, 어쩐지 좋은 시절이었던 아이인 내 모습을 완전히 상실할 것만 같아 외면하던 게 더 큰 ‘성숙’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 또한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정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짐작했던 것만큼 서글프다거나 하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가올 마주함, 보호와 안정 아닌 자유의지가 조금은 기대가 되는지도.



드디어 나도 루비를 따라 고무대야 밖 세상으로 나간다.



안녕, 어른.

그리고 안녕, 내 안의 피터팬.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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