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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양세계 Jan 10. 2023

우쿨렐레로 하나 된 체코의 밤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이라면 집안 가득 늘어선 악기를 보고 혹시 집주인이 음악 종사자일지 궁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끝까지 정복하지 못한 악기들의 무덤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리스너였던 나는 플레이어의 기쁨도 누려보고자 여러 악기에 도전해보았지만 결국 즐길 정도로 연주하는 실력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나의 손때를 타고 있는 악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우쿨렐레이다.


우쿨렐레는 내가 독립한 무렵부터 나와 함께한 동반자 같은 악기이다. 우쿨렐레의 장점은 우선 줄이 4개라서 줄이 6개인 기타보다 코드 잡기가 훨씬 쉽다. 게다가 줄의 재질 또한 부드러워서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코드를 누를 수 있다. 또 울림통이 기타보다 훨씬 작아서 소리 크기도 작기 때문에 부담 없이 연주할 수 있으며 맑고 카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특징이 있다.


대학생 때 혼자 동유럽으로 훌쩍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여행 장소가 겹칠 때 읽으면 특별할 것 같아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럽 여행기를 담은 책인『먼 북소리』도 캐리어에 함께 가져갔다.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 책에서 날씨가 흐리다는 대목을 읽었는데 정말로 날이 그렇길래 끄덕이면서 여행할 수 있어서 재밌었다. 오스트리아도 재밌었지만 사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는 낭만의 도시 체코의 프라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석상들은 까맣게 썩어있고 날씨도 어둡고 축축해서 기대보다는 우울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불친절한 식당에 방문하는 등 썩 유쾌하지 않은 일들도 겪게 되었다. 심적으로 지친 채로 체코의 시골 마을인 체스키크룸로프로 가는 버스에 탔는데 그 와중에 뒤에 앉은 술 취한 할아버지가 계속 나를 쿡쿡 찔러댔고 그 옆에 앉은 아들들은 낄낄거리며 그저 구경만 하고 있어서 더 환멸을 느꼈다. 하지 말라고 화를 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짜증을 참으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이 빨리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체스키크룸로프의 소박하고 한적한 정취는 울적해진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특히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직원이 굉장히 친절했는데 나의 어색한 체코어 감사 인사 "Dekuji(제꾸이)"도 상냥하게 받아주었고 체코 말도 가르쳐주셨다. 무엇보다도 그 게스트하우스가 마음에 들었던 점은 바로 우쿨렐레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고 튜닝이 하나도 맞지 않는 작은 우쿨렐레였지만 튜닝앱으로 조율을 하니 그래도 어느 정도 들을 만하게 소리가 맞춰졌다. 일정이 끝난 저녁, 게스트하우스의 거실은 비어있었고 나는 혼자 식탁에 앉아 용기를 내서 우쿨렐레를 치기 시작했다. 평소 즐겨 연주하던 레퍼토리를 음소거에 가깝게 아주 작게 연주하고 있었는데 비어있던 거실에 어떤 청년이 나타났다. 거실에 있는 TV를 보러 온 줄 알았는데 그는 갑자기 기타를 들고 와서 내 앞에 앉았고 당황해하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 뒤 콜롬비아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우쿨렐레 소리가 맘에 드니 한 곡 쳐달라고 했다. 긴장한 내가 사실 잘 못 친다고 하니 자신도 기타를 잘 못 친다며 우쿨렐레와 기타를 번갈아 가면서 한 곡씩 연주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떨면서 키요시 코바야시의「Mizutamari」라는 곡을 연주했다. (물웅덩이라는 뜻으로 물결이 번지듯 또랑또랑한 느낌의 곡이다. 우쿨렐레를 배운다면 한 번쯤 마스터하게 되는 연주 입문 곡으로 유명하다) 답례로 콜롬비아 청년이 Kings of Convenience의 「Cayman Islands」를 연주했는데 아까 기타를 잘 못 친다고 했던 말이 거짓부렁이었다는 걸 깨달을 만큼 연주도 좋았고 노래도 잘 불러서 귀가 황송해지는 기분이었다. 체스키크룸로프의 고요함에 잘 어울리는 기타 선율이 아름다운 선곡이었다. 그렇게 서로 연주를 계속 주고받다가 내가 The Velvet Underground의 「After Hours」를 연주했고 나처럼 루 리드를 좋아한다는 그도 내 반주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노래 취향은 같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둠이 내리고 문이 닫힌 게스트하우스의 빈 거실을 맑은 음악 소리가 가득 메우자 어느새 나쁜 기억은 물러가고 가사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밤이 이어졌다. 낯선 프라하의 시골 마을에서 기타를 치는 콜롬비아 청년과의 합주는 음악의 선율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악기는 언어가 달라도 상대와 교감할 수 있게 연결해주는 매력적인 도구이다. 악기와 대화하는 법을 익히려면 긴 시간과 많은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손가락 가죽이 필요하겠지만 우쿨렐레 덕분에 특별한 추억이 생겨서 악기를 배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악기가 하나쯤 있는 것은 꽤 든든한 기분이다. 말없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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