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와 이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내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그전에 깨작깨작 모으면서 한 번 제대로 써 보지도 않은 10년 가까이 오래된 아스티에 드 빌라트 몇 가지를 덩그러니 들고 새 집에 입성했고 젓가락부터 냄비까지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주방 살림을 구매하게 되었다. 몇 번 도쿄를 오가면서 기본적인 그릇들과 수저를 구입했고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몇 가지 들였다. 처음에는 프라이팬도, 냄비도 무조건 작고 귀여운 사이즈를 샀는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결정인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인분 국수를 끓여도 금방 넘쳐버리는 냄비는 정말 이유식에나 쓸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구매할 때는 몰랐다. 버미큘라는 블로그 나의 시선에서 소개해서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언젠가 냄비를 사게 된다면 스타우브의 것을 사야지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첫 법랑 냄비로 버미큘라를 들였다.
거두절미하고, 버미큘라는 편의를 위한 제품은 아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것들은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운 독일 산 집기들보다 세심한 돌봄이 필요하다. 빠르고 신속한 조리, 쉬운 뒷정리에는 걸맞지 않다. 기본적으로 저온에서 조리하도록 만들어진 제품이고, 관리도 상당히 까다롭고 시간이 소요된다. 대신 잘 만들어진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정리하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면 안성맞춤이다. 법랑 냄비로 할 수 있는 요리의 맛이나 우수성에 대해서는 요리에 대한 그만한 일가견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무수분 카레를 만들기가 너무 쉬운데 참 맛있고, 냄비가 너무 예뻐 사용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음식의 맛보다는(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맛을 내는데 중요한 것이 냄비만이 아니니니까) 사용할 때 내가 느끼는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백 점짜리 물건이다.
2년 전 첫 구매 이후로 26센티 오븐팟 라운드를 제외하고 프라이팬과 최근 나온 신제품까지 모두 사용 중이다. 가장 먼저 구매한 것은 18센치의 분홍색 오븐 팟 라운드. 그리고 너무 귀여워서 3가지나 구입해버린 14센치, 조금 더 큰 것도 필요할 것 같아 22센치를 구매했고 최근에 친한 언니가 26센티 전골냄비를 선물해 주었고, 새로 나온 18센치의 얕은 버전인 그라탕 오븐팟라운드를 마지막으로 들였다. 18센치 분홍색 오븐팟라운드를 구매했을 때 마치..... 아기 강아지를 새로 데려온 것 처럼 너무 귀여워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 나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정말로 너무나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버미큘라를 이렇게나 만족하면서 사용하는듯하다. ) 14센치 오븐팟라운드를 여러 개 구입한 이유는. (이유가 필요했는데) 우선 솥밥을 열심히 먹을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한 변명과 함께 기본으로 2개는 준비하고, 나머지 하나는 혹시나 찌개나 다른 냄새가 강한 음식과 밥 냄비를 따로 구분하겠다는 요량이었는데 솥밥은 딱 한 번 해먹었다. 예쁘기는 정말 예쁘고, 사실 기분 따라, 음식 따라 색을 바꿔 사용하는 것이 꽤 귀엽기는 하다. 더 큰 냄비들은 자리도 많이 차지하니 색상별로 여러 개 들이기는 어려울 테고, 나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4센치와 18센치만 있는 상태에서 생활해 보니 조금 더 큰 것이 있어도 잘 사용할 것 같아 22센치를 들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거대했고, 생각보다 너무 많이 무거웠고, 사용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18센치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샤브샤브를 먹는다거나, 옥수수를 찐다거나, 양을 넉넉하게 잡은 갈비찜 같은 음식은 18센치로는 어렵다) 지름뿐 아니라 높이가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1.2인 요리에는 매일 쓰게 되는 거 사이즈는 아니라는 것. 최근에 전골냄비를 선물 받아보니, 의외로 1-2인 가정에는 22센치보다 쓰임새가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름은 훨씬 더 커졌지만 깊이가 얕아 전체적인 부피 부담이 덜하고 더 손이 자주 갈 것 같다. 마지막으로 들인 것이 18센치 그라탕 냄비. 매우 마음에 든다. 각종 야채를 넣고 올리브유를 두른 후 약불에 10분, 한번 섞어주고 다시 약불로 10분 가열하고 적당량의 버터를 넣어 야채 찜을 만들고 그 옆으로 닭이나, 고기류의 단백질을 채워주면 예쁘게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여러 가지 크기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을 담아 냄비째 상에 내지 않더라도, 음식의 양에 맞는 크기의 냄비를 사용하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는 점. 보통 찌개를 먹는다면 14센치는 보기는 좋지만 양이 둘이 먹기에 아쉽고 18센치는 너무 커서 차림새가 좋지 않은데 그라탕 냄비는 더욱 좋을 듯하다. 22센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크기이다. 색상은 기본 컬러와(핑크,브라운,연두색,그레이) 추가 금액이 발생하는 스페셜 컬러로(화이트,베이지,연한 하늘색인 스톤,블랙) 나누어지는데 선택할 때는 펄이 들어간 유광의 유색과 무광 검정으로 나뉘어 생각하면 된다. 나는 화이트,스톤,블랙으로 14, 핑크 18, 베이지 22, 나머지 전골과 그라탕은 무광 블랙을 선택했다. 밝은 색상이라고 특별히 관리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내부의 코팅 여부에 따라 사용감이 더해진다는 것이 유광 코팅의 컬러들의 같은 특징이고, 무광 블랙은 표면이 무광이라는 특징 때문에 관리 소홀 시 얼룩이 지기도 하기 때문에 블랙이라고 특별히 관리가 더 수월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유광으로 내부가 코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코팅의 변화는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버미큘라 오븐팟라운드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 번째 강불로 사용하지 말 것, 둘째는 사용 후 관리에 유념할 것이다. 버미큘라 냄비의 뚜껑과 접합부는 코팅이 되어 있지 않다. 뚜껑을 닫고 조리하거나 보관할 때 그 부분에 녹이 쉽게 쓸게 되는데, 인체에는 무해하지만 가능하면 녹이 없이 사용하는 것이 좋으니 사용 후 바로 세척해서 닦은 후 접합 부부분에 올리브 유등을 살짝 발라주거나 뚜껑을 반대로 뒤집어 보관한다. 만약 음식을 한 후 뚜껑을 덮어 오래 둔다면 (반나절 이상) 뚜껑을 열었을 때 무조건 녹이 쓸어있을 것이다. 음식 통째로 냉장고에 오래 두기에도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내부 세척은 중성 세제가 기본, 베이킹소다로 눌어붙은 자국을 닦아낼 수도 있다. 테두리에 녹이 생기는 것으로 버미큘라에 문의를 했을 때 큐네이처 크림을 보내주셨는데 식물성 원료를 발효하여 만든 고체형 친환경 세제로 제품에 무리가 가지 않게 세척하기에 좋았다. 버미큘라를 구입했다면 받침과 팟 홀더는 필수 구매품이다. 음식을 조리해서 테이블에 직접 올리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잘 만들어진 받침은 높은 가격대에도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제품이다. 두 가지 다른 색상의 나무로 만들어져있고, 내부에 자석이 있어 손쉽게 사용할 수 있고 보관 또한 매우 용이하다. 법랑 냄비는 가열하면 전체가 뜨거워지기 때문에 팟 홀더는 더없이 필수인데 일반적인 오븐 장갑보다 길이가 짧아 불편해 보일 수 있지만 사용해 보면 오히려 훨씬 편리하다. 이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버미큘라 정품을 사용하면 사용하다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보상판매가 가능하다. 버미큘라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필요한 일부 정보를 제공하면 같은 모델의 같은 색상을 30% 할인된 금액에 다시 구매할 수 있다. 혹시 사용 시 큰 문제가 생긴다면 이 점 또한 매우 매력적이다. 나는 2년 전 구입한 첫 버미큘라가 많이 낡아 최근에 보상판매로 새로 구입하였고, 만족했다.
기본적으로 후다닥해 먹고 후다닥 치울 음식에 버미큘라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본적으로 초약불, 약불로 조리하는 것에 맞추어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강불로 빠르게 끓이고 식사도, 뒷정리도 간편했으면 하는 라면과 같은 간단한 음식에 맞는 주방 살림은 아니다. 14센치는 작은 크기 덕에 관리가 그래도 훨씬 수월한 편이라 1인분 라면을 예쁘게 먹고 싶고, 기분을 내고 싶으면, 내부 유광 코팅이 되지 않은 검정 색상으로 끓여먹을 때도 있지만 주로 우동이나 라면을 끓여 먹는 데는 다른 냄비를 사용한다. 가격대가 있는 제품이라서도 있지만 고민하고 구매한 제품은 아껴서 사용하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사용할 때도 아껴서 사용하고, 뒤에 정리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물건은 소모품이니 마음대로 사용하는 입장도 존중한다.) 그리고 버미큘라는 그렇게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 방문하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물론 일본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방문하더라도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은 있기 마련일 것이지만) 작고 사소한 것에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로 일본의 주부들이 요리를 하고 살림을 꾸리는 모습을 보더라도 능숙하고 빠른 모습보다는 얌전하고, 정성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버미큘라도 그런 사용자를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 물건이라는 생각에 쓰면 쓸 수록 들면서 사용한지 오래 되었어도 늘 새것처럼 아끼며 대하게 된다.
나는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일상으로 많이 풀어내는 편이다. 아침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을 마친 후에 샤워하는 것을 좋아한다. 몸에 좋은 촉감의 옷을 입고, 좋은 향의 제품을 바르고, 마음에 드는 작은 물건들을 구입해 생활 곳곳에 배치해서 사용하는 것으로 재미도 느끼고 위로도 얻는다. 하루 두 번 하는 식사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예쁜 살림살이로 간단하더라도 정성스럽게 조리하는 과정과 준비해 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일을 하는 동안 좋아하는 향을 가까이 두고, 좋아하는 전자기기들을 사용하고, 필기감이 좋은 펜을 쓰는 것도 즐겁다. 간식으로 좋아하는 과일을 귀여운 접시에 담아 먹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컵에 음료를 담아 마시면서 일하는 것도 좋다. 일을 마친 후에는 좋아하는 제품들로 자기 전 마무리를 하고 아끼는 잠옷을 골라 입고 하얗고 바삭한 이불을 덮고 눕는 것이 좋다. 물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관계를 내 삶의 귀중하고 소중한 부분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또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잘 지내는 것, 사적으로 만난 친구와는 같아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대하지 않고 그 사람 자체에 집중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진심이 헛수고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인간관계를 내 편의대로 생각하고 재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사 내가 억울함을 느끼는 일이 생기더라도 타인을 탓하기보다 나를 돌아보고 최선을 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결국 내 삶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모든 것에 정성을 들일 때 행복했다. 그것이 일이 되었든, 생활이 되었든, 관계가 되었든 내가 편하고 쉬운 대로 했을 때보다 정성을 들였을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쳇바퀴 도는 일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상은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다. 내가 어떤 태도로 일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탈출하고 싶은 감옥이 될 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달라질 뿐이다. 일상에서의 도피보다는 일상을 좋아하는 것들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로 채우는 것이 행복의 총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즐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노력하면서 즐기는 것.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에서나 거저는 없는 법이다. 지난 2년간 사용한 버미큘라는 깨끗하게 정리된 오븐팟라운드를 꺼내 음식을 준비할 때, 식사가 끝나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사용한 냄비를 정리할 때, 모든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즐기라고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대하는 삶을 위해, 작은 순간에도 정성을 들이는 삶을 위해. 좋은 물건과 좋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