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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즐리 May 21. 2022

우리의 고해성사

흘려보내는 시간

집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두어 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하는데 계속 졸음이 쏟아졌다. 밖으로 나가 바람을 좀 쐬면 잠이 깰까 싶어서 우리는 실내에 짐을 놔둔 채로 카페 밖 마당에 잠시 나가 있기로 했다. 카페 인테리어가 예상과는 달리 내 취향과 거리가 멀어 실망했지만,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산의 절경과 산들바람이 퍼다 나르는 아카시아 향기에서 이곳에 온 이유를 대신 찾은 것만 같았다. 풍성한 숲 내음은 그리 애쓰지 않고서도 내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더니 내 마음속에 오래 자리하고 있던 응어리까지 건드리고는 보드랍게 만들었다. 무엇을 더하지 않아도 묵직하고 순도 높은 향기였다. 그 향이 대단히 특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기품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귀국해 이곳 경기도 포천에 머물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는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는 서울에 살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연고도 없는 이 시골에서 잠시 머물게 됐다. 그녀가 언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나 역시도 이제 막 안식년을 마치고 회사 입사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전에 꼭 서로 시간을 내 얼굴을 보기로 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친구를 픽업하기 위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양볼이 핼쑥해져 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걱정이 앞섰지만 곧바로 살짝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 내 시선이 닿았을 때 나는 안도했다.


우리는 2009년 어느 봄날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의 옛 연인의 친구의 친구로서 처음 대면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물론 지금은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태다. 누군가를 거처 만나게 된 인연은 그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 원 플러스 원처럼 함께 끝나는 것이 내가 사는 우주의 법칙이었는데, 그 금기는 그녀로 인해 완전히 깨져버렸다. 우리는 서로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우리만의 연결고리를 걸어두고는 지금까지 그 고리를 붙잡아 두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이어가게 했는지 딱히 궁금해하거나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마치 나와 같은 종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을 것이라고 대중했다.


나는 그녀를 만났던 다른 날들처럼 남에게 잘하지 않게 되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보통 나의 인생의 뿌리부터 들추어내야만 상대에게 이해가 될 수 있는 방대하고 깊이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전해졌을 때 쉽게 그 의미를 잃거나 퇴색되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다사다난했던 연애사를, 공황 증상이나 가끔 겪는 불안과 우울을, 서른 중반 싱글 남성이 부모와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을, 그리고 그보다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쉽게 뱉어냈다. 그녀와 이야기할 때면 내가 알고 있던 어떠한 규범이나 가치관을 통하지 않고도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대화 방식은 고해성사와 닮아있기도 했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수평선 위에 놓여져 높낮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항상 같은 온도로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물처럼 흘려보냈다. 그래서 나의 말들은 그녀와 함께 할 때면 더 이상 고여있지 않게 된다.


오늘은 그녀가 내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들을 흘려보냈다. 내가 그녀를 만날 때 느꼈던 무사함이 오늘 그녀에게도 닿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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