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월급루팡

어묵탕

by 퉁퉁코딩

수동적 월급루팡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최선을 다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루들이 계속된다.

회사에 앉아 있지만 처리할 업무는 없다.

마우스를 잡고 있기는 한데 클릭할 아이콘도 없다.

가만히 켜두기만 한 컴퓨터는 종종 대기 모드에 들어간다.

나는 출근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출근하고,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 이상한 공백 속에서 아무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누군가는 왜 일을 안 하느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눈치를 줄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동료들의 시선에는 묘한 연민 같은 것이 섞여 있다.

지금은 내가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듯하다.



시작은 열 달쯤 전이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복지제도를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재직 중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제도였고, 나는 그동안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이미 충족한 상태였다.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더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제도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당분간 맡은 업무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래서 먼저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상사들과의 면담도 차례로 마쳤다.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업무 걱정은 하지 말라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오히려 등을 떠미는 분위기였다.


남은 건 담당 임원의 서명 하나였다.

사실 임원이라는 자리가 개별 직원을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관리하는 위치는 아니다.

그래서 이 절차 역시 형식적인 마지막 단계라고만 생각했다.

이전에 이 제도를 사용했던 다른 부서의 직원들에게서도 임원의 서명이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의 담당 임원은 업무에서 빠지는 건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며 서명을 거부했다.

본인은 이 제도를 복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이 제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준에 맞는 책임감과 직업윤리를 따로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심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상담을 한 번 받아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인사팀에 알아본 뒤 자신의 서명을 거부할 수 있다면 서명하지 않겠다고 했다.

말끝에는 은근한 으름장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인사 규정을 다시 확인해보아도 문제는 없었다.

해석의 여지도 없고, 논쟁할 거리도 없는 사안이었다.

나는 내 계획대로 복지제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임원은 서명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에 조직개편이 있었다.

내가 속해 있던 조직은 다섯 개의 소조직이 셋으로 줄어들었고, 업무는 새로 분배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아무런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임원은 더 이상 조직에서 활용 가치가 없으니 다른 조직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지금 같이 일하는, 곧 같이 일했던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 동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다.

옆자리의 동료는 딴 데 가지 말고 그냥 계속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되겠냐고.

예전에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했던 동료는 다시 같이 일하고 싶어서 내가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이 조직에 오래 몸담았던 선배는 자기가 봐온 직원들 가운데 일 잘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때 내 고과를 매기던 분이었고 지금은 다른 조직에 있는 부장님은 오히려 본인이 더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내가 활용 가치가 없다는 말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다른 부서로의 이동을 지원해 둔 상태다.

할 수 있는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지원한 부서에 뽑히지 않더라도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곳들이 몇 군데 있다.

그래서 조만간 부서 이동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질 것 같다.


모든 업무에서는 이미 손을 뗐다.

이제 2주째, 그저 회사에서의 시간을 버티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직무와 관련된 책을 읽거나, 사내 시험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동료들이 업무 이야기를 나누다 어딘가 막히는 순간이 있고, 그게 내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다.

굳이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합류해 손을 보태곤 했다.

지금은 똑같은 상황이 와도 나서지 않는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귀에 들리는 업무 이야기를 애써 외면한 채 말하지 않을 답을 혼자서만 정리해본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바쁠 때에는 일 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냥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정말로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그 말들은 바쁠 때만 할 수 있었던 사치 같은 푸념이었다는 걸 알겠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는 생각보다 버티기 어렵다.

이 시간은 편안함보다는 그저 씁쓸한 쪽에 더 가깝다.



그런 씁쓸한 맛을 보고 싶었다.

어릴 때였다면 분명 인상을 찌푸렸을 맛인데, 어른이 되고 나니 오히려 입맛을 돋우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씁쓸한 맛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묵탕 위에 올라간 쑥갓이 유난히 생각났다.

없어도 되는 재료인데, 있으면 국물 맛이 달라지는 그 쑥갓을 입에 넣고 싶었다.


기분도 전환할 겸 좋아하는 재료인 어묵을 잔뜩 넣고, 쑥갓도 마음껏 넣어 뜨끈하게 끓여보기로 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무 한 조각과 코인 육수, 구운 팽이버섯과 느타리버섯을 넣어 끓인다.

다진 마늘과 파를 넣고, 홍게 간장에 소금을 조금 더해 간을 맞춘다.

납작한 어묵, 동그란 어묵, 구멍 난 어묵, 길쭉한 어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넣는다.

꼬치 어묵도 몇 개 더 얹어준다.

이런 날에는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어묵을 많이 넣고 싶어진다.

곤약도 한 번 삶아 넣고, 표고버섯을 올린 뒤 마지막으로 쑥갓을 얹어 마무리했다.

쑥갓은 숨만 죽으면 충분하다.

간장에 고춧가루, 후추와 참기름, 빻은 깨를 넣어 어묵을 찍어 먹을 양념장도 하나 준비했다.




1월의 추운 저녁에는 역시 어묵탕이 잘 어울린다.

어묵을 하나 건져 입에 넣자 부드러워진 생선살이 씹을수록 조용히 풀린다.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면 처음에는 짭짤하고, 뒤에는 무에서 나온 단맛이 늦게 따라온다.

몸을 확 풀어주기보다는 버틸 만큼만 따뜻하게 해준다.

쑥갓의 향은 입 안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잠깐 스쳐 지나간다.

마치 나의 씁쓸한 일상도 그렇게 지나가 주기를 바란다는 듯이.


어묵탕을 먹으며 아내는 그냥 확 때려치우고 이직해도 된다며 오빠 뽑아줄 곳 많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아내를 말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어묵탕 국물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아내의 말이 국물보다 더 든든했다.



어느새 지금의 조직에서 일한 지도 6년이 되었다.

그 사이 조직의 인원은 네 배 가까이 늘었고, 나는 그 성장의 한가운데를 함께 지나왔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그 마음은 땅속에 묻힌 씨앗이었을 뿐 아직 싹을 틔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었다.

스포츠 선수에 비유하자면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셈이지만, 소속 팀을 구하지 못하면 은퇴해야 하는 선수와 달리 나는 그저 부서만 옮기면 된다.

정규직이라는 이름이 주는 안정이기도 하고, 나보다 조직에 늦게 합류한 윗사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조용한 설움이기도 하다.


과일 향이 들어간 시럽약조차 입에 대지 않겠다며 몸부림치던 아이도 어느새 자라 아무렇지 않게 주사를 맞고, 알약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어른이 된다.

예전 같았으면 화를 참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부당하다고 느꼈을 씁쓸한 상황을, 이렇게 담담하게 넘기고 있는 나를 보며 조금더 자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의 후기

어묵탕
★5.0점
신랑이 특히 좋아하는 어묵탕을 직접 만들어 먹으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어묵 종류도 이것저것 다양했고, 곤약도 처음 써봤는데 버섯도 예쁘게 칼질해 넣고 마지막에 더한 쑥갓 향까지 정말 근사했어요.
으슬으슬한 초겨울 저녁에 뜨끈한 어묵탕으로 몸과 마음을 노곤노곤하게 데웠습니다.
맛도 물론 좋았지만, 감성 점수로 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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