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테, 표고버섯 야채볶음
회사에서 모처럼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너무 자유로워서 주제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디어 회의라기보다는, 누가 더 독특한 얘기를 꺼내느냐의 잡담 콘테스트에 가까웠다.
그때 부장님 한 분이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주변에 음성 명령으로 가전제품 제어하는 사람 본 적 있나요?"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저희 아버지요. 리모컨이 바로 옆에 있어도 꼭 에어컨 켜달라고 음성명령 사용하세요."
부장님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와, 아버님 굉장히 젊게 사시네."
그 순간, 우리 부모님의 나이를 알고 있는 옆자리 동료가 슬쩍 말했다.
"OO님 부모님, 실제로도 젊으세요."
그렇게 잡담 콘테스트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우리 부모님의 젊음으로 전환되었다.
다행히 그 회의는 회의록도 남기지 않을 만큼 가벼워 '부모님 나이'가 회사 기록에 영구 보존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꽤 일찍 낳으셨다.
고등학생 때 연애를 시작하셨고, 아버지께서는 군 복무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셨다.
사실상 제대 신고를 웨딩홀에 하신 셈이다.
우리나라는 2023년 6월 1일, 만 나이 통일법을 시행했다.
드디어 나이 계산 하나는 단순해지려나 싶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복잡하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일상에서는 여전히 세는 나이가 활발히 사용된다.
요즘은 그래서 아예 나이를 '범위'로 표현하는 사람도 생겼다.
"제 나이는 28세에서 30세 사이입니다" 이런식으로 말이다.
여기서는 부모님이 나를 처음 만난 나이를 되도록 젊어 보이게, 만 나이 기준으로 이야기하겠다.
당시 아버지는 23살, 어머니는 21살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40대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부터 '나도 부모님을 40대에 할아버지, 할머니로 만들겠다'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주 순진한 계획이었다.
그 사이 세상의 속도와 기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모님이 40대이던 시절 안에 학업을 마치고, 취업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지고, 결혼까지 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상의 시뮬레이션 속에서 최적 경로 알고리즘을 아무리 돌려도 답이 잘 안 나오는 미션이었다.
그래도 나는 친구들 중에서는 비교적 일찍 결혼한 편이다.
어릴 적부터 '일찍 결혼할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보다는, 메뉴판 없는 식당에 단 한 명뿐인 단골손님으로 아내가 일찍 나를 찾아와 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아내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그러다 보니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한 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부케였다.
받을 사람이 있어야 던지지 않겠는가.
그 시점, 아내 친구들 중엔 결혼을 준비 중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결국 연애는 오래 했고 마음속 결혼의 카운트다운쯤은 시작한 친구가 기꺼이 부케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유난히 화창하고 포근했던 11월의 어느 날, 30살과 26살의 나이로 부부가 되었다.
일찍 결혼하다 보니 아내는 결혼에 대해 딱히 비교할 무언가가 없었다.
친구들 중 가장 먼저 결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 결혼식에 가본 경험도 손에 꼽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중에도 최근에 결혼한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이 정도 예산은 잡아야죠", "요즘 그 정도는 다하는 거예요" 같은 훈수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기준도, '이렇게 꼭 하고 싶다'는 로망도 없었다.
타인에 의한 기준이라는 강적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결혼 준비는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드레스도, 반지도, 예식장도, 우리 마음에 들면 그걸로 충분했다.
예식장 투어는 단 하루.
우리는 두 번째로 방문한 웨딩홀에서 바로 마음을 정했다.
그곳은 생화로 가득했고,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꽃내음이 후각을 사로잡았다.
살짝 어두운 홀 안에서 반짝이던 조명이 시각을 훔쳤다.
식장을 둘러싼 공원에서는 잔잔한 새소리가 들려와 청각마저 뺏겼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던 음식은 미각을 들뜨게 했다.
서로 잡고 있는 따뜻한 손에 촉각은 이미 혼미했다.
오감이 전부 만족했으니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했다.
반지도, 예외 없이 쉽고 빠르게 결정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백화점 한번 가볼까?"
그러자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종로에 두 군데 예약해 놨어. 거기부터 가자."
첫 번째로 방문한 매장에서 아내는 여러 반지를 껴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하트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손에 끼워봤다.
그 순간, 눈빛이 반짝였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알 수 있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확신에 차 물었다.
"이거지? 다른 거 더 안 봐도 되겠지?"
아내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응!!!"
그렇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결정했고, 두 번째 매장 예약은 바로 취소했다.
브랜드 반지가 아니었기에 흔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고른 반지 두 개 가격은, 백화점이었다면 반지 하나 값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내는 지금도 그 반지를 정말 좋아한다.
그러니까 이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택이었다.
결혼 1년 후, 우리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광장 한쪽에 꽤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신혼부부의 조용하고 달달한 디저트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를 향한 익숙한 모국어가 들려왔다.
"사진 찍게 좀 비켜주세요."
고개를 돌려보니,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앞엔 한국인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처음 알았다.
해외까지 와서 웨딩 촬영을 하는 시대라는 걸.
반면 우리는?
아내가 고른 푸릇푸릇한 스튜디오 한 곳에서 햇살 맞으며 평화로운 컨셉으로 순조롭게 끝냈다.
조금은 더웠던 날씨로, 중간에 아내가 많이 힘들어해 쉬어가긴 했다.
귀엽고, 따뜻하고, 행복한 컷이 꽤나 많았다.
지금도 웨딩사진들은 우리 부부의 침실과 나의 서재를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다.
비교하지 않는 결혼은 오직 우리 둘만을 위한 결혼이 된다.
비교하지 않으면,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온다.
오늘의 메뉴는 바쿠테다.
바쿠테는 돼지갈비를 푹 고아 만든 요리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널리 사랑받는 음식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입맛에도 아주 잘 맞는다.
내가 일하는 IT 업계에는 판교어라는 독특한 언어가 있다.
일종의 한국어와 영어의 하이브리드 방언이다.
그냥 "인수인계할 회의 좀 잡아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굳이 "널리지 트랜스퍼를 위한 미팅 좀 셋업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바쿠테도 비슷하다.
이름만 들으면 뭔가 대단하고, 손 많이 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돼지갈비탕이다.
그러니 괜히 겁먹을 필요 없다.
생각보다 레시피는 간단하고, 특별한 재료도 필요 없다.
먼저, 갈비찜용 돼지갈비를 한 시간 정도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그다음 5분 정도 삶고, 깨끗이 씻어준다.
다음은 맛을 입힐 차례다.
씻어낸 갈비에 마늘, 굴소스, 설탕, 소금, 후추,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고 센 불에 10분 정도 조린다.
이때 주방엔 오늘 특별한 요리 한다는 향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다음 물을 넉넉히 추가하고 약 50분간 푹 끓여준다.
마무리로 파와 소금, 후추를 톡톡 뿌려주면 끝이다.
고기를 찍어 먹을 소스도 어렵지 않다.
간장, 굴소스, 설탕, 청양고추 이 네 가지면 충분하다.
매콤달달 짭짤한 것이 고기와 기분 좋은 조합이다.
곁들임은 표고버섯 야채볶음이다.
냉장고 속에 남아있던 야채들과 표고버섯을 기름 두르고 휘리릭 볶는다.
간은 굴소스에 소금 약간이면 딱 좋다.
접시에 담아내고 깨소금을 솔솔 뿌려주면 완성이다.
오늘 공들여 만든 요리들을 하나씩 식탁 위에 올린다.
그리고 갓 지은 따끈한 밥 한 그릇을 담고, 김치도 곁들인다.
어느새 식탁이 제법 그럴싸해졌다.
이 정도면, 오늘 한 끼는 꽤 근사하다.
바쿠테라는 음식을 처음 알게 된 건 싱가포르 여행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바쿠테로 유명한 두 곳의 전문점을 방문했다.
두 곳 모두 맛있었지만, 그중 한 곳은 유난히 아내의 입맛에 딱 맞았다.
아내는 원래 빨간 국물보다는 하얀 국물 쪽을 더 좋아한다.
매운 음식도 즐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에 더 끌리는 편이다.
그런 아내에게 바쿠테는 딱 적합한 음식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문득 바쿠테가 생각나 레시피를 찾아봤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나 간단했다.
나는 바로 재료를 주문해, 기억 속의 그 바쿠테를 재현해 아내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어느새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역시나 우리는 둘 다 만족스러웠다.
고기를 뜯으며, 국물을 들이키며, 약간의 보양식을 먹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번 바쿠테는 유난히 잘 만들어졌다.
평소보다도 국물은 진했고, 깊은 맛이 났다.
나는 괜히 기세가 등등해져, 아내에게 물었다.
“이번 바쿠테, 진짜 맛있지 않아?”
아내도 만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맛있네. 숟가락이 멈추질 않아."
여기까진 완벽했다.
그런데 내는 괜히 한 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싱가포르에서 네가 좋아했던 그 바쿠테 집이랑 비교해도 손색없지? 거기 굳이 다시 안 가도 될 정도지?"
아내는 이럴 땐 유난히 냉정하다.
"에이, 그건 아니지~ 오빠가 만든 것도 너무너무 맛있지만, 그 집 고기 얼마나 부드러웠는데!!"
아내에게 결혼식은 비교 대상이 없었지만, 바쿠테만큼은 명확한 비교 기준이 존재했다.
추억 보정에 여행의 낭만까지 더해진 그 바쿠테를 내가 이길 도리는 없다.
그래도 나는 말한다.
"내 것도, 진짜... 꽤 맛있다고!!"
아내의 후기
바쿠테
★4.8점
돼지고기가 야들야들하고, 맑고 진한 육수와 잘 어울렸습니다!
싱가포르 여행에서 바쿠테가 참 맛있어서 두 번이나 먹으러 간 기억이 있어요.
그 기억을 되살려준 행복한 만찬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맑고 깊은 육수가 일품이었어요~!
표고버섯 야채볶음
★4.2점
버섯과 야채의 조화가 정말 좋았어요.
부드럽고 담백해서 쑥쑥 넘어가더라고요.
P.S.
바쿠테의 남은 국물은 다음 날, 냉장고 속 버섯과 만두를 넣고 다시 끓였다.
이것만큼은 비교 대상도, 기준점도 없는 또 다른 별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