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따뚜이, 스테이크, 카프레제
2017년 겨울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 졸업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허름한 옷차림에 슬리퍼 차림, 하루 종일 노트북만 들여다보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 연구실에 있던 오후, 갑자기 누군가 노크를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왜 왔어?"
그녀는 바닥만 바라보고, 정말 뜬금없이 말했다.
오빠, 좋아해요.
"어?"
"오빠, 좋아한다고요."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한 나는 점잖은 척을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 최선을 다해 점잖은 척을 했다.
"넌 뭐 그런 얘기를 여기서 해. 일단 생각해 보고 말해줄게. 가서 공부하고 있어."
"네..."
진짜, 이게 대화의 전부였다.
생략 없이 있는 그대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그녀를 다시 불러냈다.
조용한 식당에 마주 앉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식사 내내 나는 그녀의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평소엔 활발하고 명랑한 그녀가 그날만큼은 쥐 죽은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이 너무 어색하고도 귀여워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 왜 그래?"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더 웃겼다.
오늘은 제가 을이에요...
고백을 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입장이니 당연히 을이라는 논리였다.
그럼 평소엔 자기가 갑이었다는 건가?
어쨌든 그 모습이 귀여웠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하려 하는데, 그녀가 그날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저 때문에 시간 내준 거니까 제가 낼게요."
그러더니 정말로 계산까지 마쳤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 근처에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데려가고 싶었던 곳이 있어. 같이 갈래?"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한참을 쭈뼛거리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신분이 '후배'에서 '여자친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도착한 곳은 작은 재즈바였다.
문을 열며 나는 외쳤다.
"사장님, 여자친구 생기면 데려오겠다고 했죠? 데리고 왔어요!"
재즈는 악보 없이 그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를 따라 흐르는 음악이다.
그날 우리 연애의 시작도 그랬다.
21살, 25살의 계획과 각본 없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재즈였다.
그날로부터 2년, 그리고도 2주가 지나 있었다.
갑자기 전류가 스치듯 머릿속이 번쩍했고 나는 여자친구에게 외쳤다.
"우리 2주 전에 사귄 지 2주년이었어!!"
그녀도 멈칫하더니 말했다.
"어? 맞네? 그냥 까먹고 지나갔네?"
그렇다.
우리는 사귄 지 정확히 2년 되는 날을 하루도, 이틀도 아닌 2주나 지나서야 알아챘다.
평소 생일 선물도 자주 건너뛰었고 기념일에 큰 의미를 두지도 않았다.
우리는 애초부터 '기념일형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괜히 결의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우리 3주년은 진짜 진짜 꼭 챙기자!"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아... 우리 3주년도 또 까먹고 지나갔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둘이 함께라면 안 변하는 시너지는 두 배가 된다.
"이번엔 진짜, 진짜 4주년은 챙기자!"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4주년을 성공적으로 기념했다.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기억했다는 점에서 이미 성공이었다.
그 감격을 등에 업고 5주년을 2주 앞둔 어느 날, 그녀의 신분은 '여자친구'에서 '아내'로 다시 한번 바뀌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공연이나 전시를 자주 보러 다니고 있다.
그림책 전시부터 미술 작품 전시, 뮤지컬까지.
꽤 알차게 신나게 잘 놀고 있다.
그중 가장 손꼽아 기다렸던 건, 바로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의 전시였다.
픽사의 세계관을 실제 세트로 재현한 체험형 전시였다.
전시를 보기 전,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미쳐보지 못했던 픽사 애니메이션들을 하나둘 챙겨 보기 시작했다.
월-E, 몬스터 주식회사, 업, 코코, 소울, 루카.
엄청난 상상력에 사랑스러운 이야기들.
그중에서도 특히 기대된 건, 귀여운 요리사 쥐 '레미'가 등장하는 영화 라따뚜이였다.
라따뚜이를 보기로 한 전날, 나는 문득 아내에게 말했다.
라따뚜이 보면서 라따뚜이 먹을래?
아내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좋지! 히히."
나는 곧장 각종 레시피를 뒤져가며 재료를 주문했다.
'이왕이면 제대로'라는 마음으로 스테이크까지 곁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요리를 시작하려는 찰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라따뚜이의 주재료인 애호박을 안 샀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함께 마트로 향했다.
애호박을 찾아 집어 들었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치즈 코너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애니메이션 속 쥐캐릭터들은 치즈를 너무나 좋아한다.
아내도 거기에 지지 않게 치즈를 사랑한다.
그녀는 생모짜렐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 표정은 너무도 분명히 이걸 사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내가 눈치를 본 이유는 단순하다.
요리는 언제나 내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눈빛은 못 본 척하기엔 너무 강력했다.
결국 나는 말했다.
"카프레제도 해줄까?"
"응!!!!!!!!!!"
"근데 우리 집에 바질도 없고, 발사믹도 없어. 어떻게든 만들어보긴 하겠는데 괜찮아?"
"당연!!!!!"
천 원짜리 애호박 하나 사러 간 마트였다.
그런데 생모짜렐라, 카이막치즈, 빵등 약 7만 원어치를 충동구매했다.
저녁을 준비하다가 급히 나온 터라 우린 엄청 배고픈 상태였다.
역시 배고픈 상태로 마트에 가는 건, 신용카드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다.
어쨌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요리를 시작한다.
메뉴는 라따뚜이, 스테이크, 그리고 예상에 없던 카프레제다.
라따뚜이는 여러 가지 채소를 얇게 썰어 소스 위에 겹겹이 올린 뒤 오븐에 구워내는 프랑스 가정식이다.
이번에 나는 가지, 애호박, 토마토를 사용했다.
소스는 다진 양파를 볶아 토마토소스와 섞어 만들었다.
그 소스를 바닥에 깔고 준비한 채소들을 번갈아 가며 정성껏 올린다.
차곡차곡 쌓은 뒤 소금 후추를 뿌리고, 30분 간 오븐에 맡기면 완성이다.
라따뚜이가 익어가는 사이, 스테이크를 구웠다.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로즈마리로 미리 마리네이드 해둔 소고기를 1분마다 뒤집어가며 10분간 구웠다.
양 옆면까지 잘 익힌 뒤에는 5분간 실온에 살포시 눕혀 레스팅 시간을 줬다.
고기는 쉬는데 나는 계속 일했다.
팬에 남은 육즙은 그냥 둘 수 없어 당근과 마늘을 구워 가니쉬로 곁들였다.
와사비 소금과 트러플 소금도 함께 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냥 집에 있는 소금 전부 꺼낸 것이 전부다.
그리고 카프레제를 만들어본다.
생모짜렐라와 토마토를 번갈아 깔았다.
바질은 없다.
그래서 깻잎으로 대신해 본다.
어쩐지 한국인의 입맛에 더 잘 맞는 기분이다.
소금, 후추까지 뿌리고 나니 발사믹 소스가 문제였다.
대신 올리브유에 굴소스와 레몬즙을 섞어 뿌렸다.
나름 비슷한 맛이 난다.
이 모든 걸 마치고 나니, 영화 한 편 보려던 계획이 어느새 정체불명의 세트 요리로 변해 있었다.
기념일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구성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나름 꽤 근사한 저녁을 즐겼다.
원래는 영화 보면서 먹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아까웠다.
우리는 식사 따로, 영화 따로 즐겼다.
야채를 좋아하는 아내는 라따뚜이가 입맛에 잘 맞았는지, 한 입 한 입 아주 진심을 다해 맛있게 먹었다.
남은 라따뚜이는 다음 날 점심으로 먹겠다며, 정성스럽게 반찬통에 담아 회사에 가져갔다.
드디어 어제 우리는 그토록 기대하던 픽사 전시를 보러 다녀왔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트 앞에서 우리는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세트 하나하나가 다시 영화를 떠올리게 했고, 그 영화들은 다시 그 영화를 함께 보던 우리를 떠올리게 했다.
함께 웃고, 함께 설레던 그 순간들이 전시 속 공간에서 캐릭터들과 어우러져 되살아났다.
그리고 오늘 문득 궁금해졌다.
어제가 우리에게 어떤 날이었을까?
디데이 카운터를 켜고 날짜를 입력해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나는 갑자기 아내에게 외쳤다.
"어제, 우리 결혼한 지 900일 되는 날이었어!!"
아내는 놀라면서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 진짜? 그런데 우리 전시 보러 간 거야? 완전 잘했네!"
기념일인 줄 모르고 다녀온 전시였지만, 왠지 알고 나니 더 뿌듯했다.
궁금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다른 날짜를 입력해 보았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라따뚜이에 스테이크 먹었던 그날 기억나지? 그날이 우리가 사귄 지 2700일 되는 날이었네?"
아내는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어머 진짜? 우리 그날 완전 기념일처럼 먹었잖아!"
우리는 기념일을 깜빡하고 지나치는 데엔 익숙한 커플이다.
그렇다고 매일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날이든 즐거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우리가 기념일을 잘 잊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날을 기념일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후기
라따뚜이
★4.0점
담백해서 자꾸 손이 가는 맛이었어요!
며칠에 걸쳐 나눠 먹었는데, 슴슴하고 건강한 맛이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먹고 나면 속도 편하고 괜히 또 한입 생각나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스테이크
★3.6점
신랑표 스테이크 맛있었습니다!
전날부터 정성스럽게 고기를 준비하던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어요.
고기가 살짝 질기긴 했지만, 요리하는 마음이 너무 부드러웠어요!
분위기 내는 데는 전혀 지장 없었습니다^^
카프레제
★4.0점
신선한 생모짜렐라 치즈와 잘 익은 토마토의 조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카프레제를 상큼하게 즐겼어요.
재료도 부족했다던데, 어쩜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냈는지 정말 놀라웠습니다.
완전 제 취향이었요!!
가볍고 산뜻해서 마지막까지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ㅎㅎ
P.S.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은 12월 14일이었다.
재즈바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갔다.
늦은 밤이었다.
정류장엔 우리 둘뿐이었다.
괜히 궁금해졌다.
12월 14일이 무슨 날인가 싶어 검색해 봤다.
허그데이...
그래서 우린 서로를 안아보기로 했다.
아내와의 첫 포옹.
드라마처럼 멋지진 않았다.
긴장한 아내는 팔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나는 키 차이 때문에 무릎이 약간 굽혀졌다.
가장 어설프고, 가장 진심이었던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