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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뒤 최대 2억을 드립니다

김치삼겹솥밥, 알배추된장국

by 퉁퉁코딩

신입사원 연수 중, 동기들과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내 시야 정면에는 벽에 걸린 TV가 있었다.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OOO사 OOO대표, 횡령 및 사기 혐의로 긴급 체포]


업계 관계자가 아니라면 아마 이름조차 모를 회사였다.

그런데 나는 밥을 먹다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식사를 함께하던 동기들이 놀랄 만큼, 본능적으로 "어!"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3개월 전 내 선택이 달랐다면, 아마 인생이 송두리째 꼬일 수도 있었던 소식이었다.



현재 나는 운이 좋게도 가장 가고 싶던 회사에 합격해, 8년째 다니고 있다.

하지만 지원 당시엔, 아무리 간절히 원하는 회사라도 나를 꼭 뽑아줄 거란 보장이 없었다.

4화의 나고야 여행 이야기처럼,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혹시라도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금융 스타트업 한 곳에도 지원서를 냈었다.

하지만 지원한 뒤 한참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도 연락이 없다 보니, 나중엔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원하던 회사에 합격했다.

신체검사 일정도 바로 나왔다.

간혹 합격의 기쁨에 매일을 축제처럼 즐기다, 간 수치가 치솟아 재검 판정을 받는 신입들도 있다.

나는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검사 3일 전부터 금주를 선언했다.

신체검사를 무사히 마치고, 후배들과 한잔할 생각에 들떠 대학원 연구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지원했던 스타트업의 공동 대표 중 한 명이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또 있나?" 하는 호기로운 마음을 품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지원했던 스타트업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어온 공동대표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출신을 소개했다.

글로벌 탑급으로 손꼽히는 유명 은행이었다.

이어서 그는 내 연구 분야와 기술 역량에 대해 열심히 물어봤다.

나는 '어디서든 환영받는 인재'가 된 기분으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덥석 제안했다.

동남아에 지사를 하나 더 냅니다.
트레이딩을 같이합시다.
목표는 6개월에 OO 억입니다.
수익의 OO%를 성과급으로 지급할 계획입니다.


빠르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성과급은 최대 2억 정도였다.

2억???

월급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예비 사회초년생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또 다른 공동대표도 나타났다.

출장을 앞두고 있다는 그는 급하게 나와 한 마디를 남겼다.

"우린 이 회사를 제2의 골드만 삭스로 만들 겁니다."

말을 하는 그의 눈빛에는 약간... 아니, 꽤나 뚜렷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솔직히, 흔들렸다.

6개월 후 2억이면 내 인생과 통장이, 심지어 프로필 사진까지 반짝반짝 빛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용감하지 못했다.

결국 스타트업으로의 도전 대신 원래 목표했던 회사의 안정성을 선택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신입사원 연수 중 점심 식사 자리.

나는 우연히 TV 화면에서, 그때 출장을 간다던 공동대표의 소식을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어! 저기, 내가 지원했던 회사야! 같이 일하자고 했었어!"

순식간에 동기들의 고개가 일제히 TV를 향했다.

그 순간, 나를 스쳐간 감정은 이런 게 죽다 살아난 기분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동기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진짜 천만다행이다."

결국 그 스타트업 공동대표 두 명과 고위 직원들 모두 실형이 확정됐다.

만약 그때 달콤한 2억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어릴 적부터 품어온 개발자의 꿈은 물론,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인 높은 청년 실업률에 기여하는 한 명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년 실업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내 주변에서도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기회를 잡지 못한 친구들이 멀리도 아닌 바로 우리 집에 있다.

싱싱하게 빛나던 시절을 냉장고 신선칸 안에서 허무하게 보내고 있는 폭삭 익은 김치, 고기, 야채들 말이다.


그들도 모두 꿈이 있었다.

다른 집으로 갔더라면 벌써 한 끼의 주역으로 활약했을 몸값 높은 인재들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방치했다.

특히 쪽파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싱그러움을 잃어가며 시들시들해지고 있었다.

일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냉장고 관리자로서 이 친구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사명감을 느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다.


그렇게 배정된 프로젝트는 김치삼겹솥밥알배추된장국이다.

가장 먼저, 솥이라는 사무실에 삼겹살을 배치한다.

사무용품으로는 소금과 후추가 지급되었다.

고기의 붉은빛이 사라질 때까지 지글지글 볶아준 뒤, 곧바로 김치도 투입했다.

추가 물품으로 고춧가루, 간장, 액젓을 지원해 줬다.


업무량이 늘어나자 현장에는 슬슬 '열기'가 감돌았다.

어느 정도 익었으면 불린 쌀을 섞어준다.

한번 끓어오르면, 중불로 15분간 집중 업무 시간을 부여한다.

그리고 10분 간의 휴게 시간 보장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뜸을 들여준다.

열심히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한 업무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쪽파를 송송 썰어 잔뜩 올려주었다.

쪽파는 푸릇푸릇한 신입답게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솥 안에서 잘 섞어 퍼낸 한 술 한 술이, 그동안 헛되이 버려질 뻔했던 시간을 구원해 주었다.



알배추된장국은 훨씬 간단하다.

끓는 물에 코인 육수를 넣고, 된장을 풀어 휘휘 저어준다.

그다음 알배추와 애호박, 파 등 일자리를 기다리던 야채들을 모두 출근시킨다.

그들의 열정으로, 국물은 뜨끈하고 든든하게 끓어오른다.

이렇게 해서, 냉장고 신선칸은 모두 깨끗하게 비워졌다.


3일 전 만들어 반찬통에 쓸쓸히 남아 있던 참나물과 깻잎순 나물까지 모두 꺼내줬다.

이로써, 냉장고 속 재료들의 일자리 창출 화룡점정이 완성됐다.



삼겹살집의 진짜 디저트는 볶음밥이다.

남은 고기와 김치를 철판에서 밥과 볶아내면 최고의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김치삼겹솥밥은 그걸 훌쩍 뛰어넘는다.

'김치+삽겹+밥'이라는 검증된 조합을 솥이라는 명품 오피스에 모아둔 느낌이다.

고기에서 나온 기름을 그대로 머금은 밥.

자칫하면 느끼할 수 있는 맛을 송송 썰어 올린 쪽파가 상큼하게 잡아낸다.

반칙에 가까운 팀워크다.


첫 숟갈을 퍼먹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되며, 숟가락을 내려놓을 생각이 사라진다.

한국인이라면 본능적으로 계속 퍼먹게 되는 맛이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에게 잠시 가벼운 투정을 부려본다.

가장 가고 싶던 회사에서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지만, 요즘 나는 왠지 지치는 느낌이 든다.

딱히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가 똑같고, 뭔가 발전도 없고, 그냥...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느낌.

냉장고 신선칸에서 빛을 잃어가던 쪽파 같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 자신도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


그러자 아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오빠, 힘들면 쉬어도 돼.
휴직을 해도 되고, 이직을 해도 되고,
아니면 그냥 퇴사하고 좀 놀아도 괜찮아.

마치 "점심 뭐 먹을까?" 수준의 가벼움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욱 힘이 되었다.


아내는 현실적인 조건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단 하나,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하라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내가 백수가 되어도 괜찮아?"

아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마.
우리 회사에도 외벌이 부부 많아.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든든히 밥을 먹은 아내는 마치 장판파의 장비 같았다.

기세가 가히 장군감이었다.


나는 스타트업 대신, 안정감을 좇아 지금 다니는 회사를 선택했다.

그때는 이 회사가 앞으로도 꾸준히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회사는 여전히 든든하다.

하지만 너무 편안해서, 마치 안락의자에 오래 앉아있다가 몸이 굳어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괜찮다.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절대 질리지 않을, 가장 단단한 안정감을 줄 존재 말이다.

그것만큼은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바로, 메뉴판 없는 식당의 단 하나뿐인 단골 내 아내다.


아내의 후기

★4.8점
저 많은 솥밥을 신랑과 둘이서 점심, 저녁으로 싹 비웠네요. 와~
오일리한 음식과 고기를 사랑하는 제 니즈를 정확히 저격해 주셨습니다.
삼겹살을 정량의 두 배나 넣어주셔서 돼지기름이 좔좔 흐르는 밥을 꿀떡꿀떡 먹었습니다.
"더 먹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세 번이나 퍼먹었네요.
아이고 참 ㅎㅎ


P.S.

혹시 냉장고에 조금씩 남아 있던 식재료들을 모두 소진했을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쾌감을 알고 있는가?

그 쾌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집안의 요리 담당이자 요리를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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