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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째 창의성 면접 중입니다

돼지갈비 감자탕

by 퉁퉁코딩

나는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총 세 가지 면접을 치렀다.

그중 가장 준비가 어려웠던 건, 두 번째 창의성 면접이었다.

지원 분야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문제 하나 툭 던져주고는 "창의적으로 풀어보세요"라고 한다.

구두를 벗든, 넥타이를 풀든 창의성만 보이면 된단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 직무로 지원했지만, 그날 받은 문제는 제품의 재고에 관한 것이었다.

경영대를 졸업한 나에겐 어쩌면 유리한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케팅 원론 수업에서 배운 이론을 활용해 무사히 문제를 풀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창의성 면접을 너무 쉽게 넘어 간 것이 업보가 되었던 걸까?

나는 그보다 더 무방비한 상태에서 훨씬 난이도 높은 창의성 면접을 8년째 보고 있다.



면접관은 메뉴판 없는 식당의 유일한 단골손님인 내 아내이다.

연애 때부터 그랬다.

예상치 못한 순간!

밥 먹다가, 책을 읽다가, 양치하다가도 불쑥 묻는다.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점 열대성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스콜이 잦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갑작스러운 스콜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미 게릴라성 창의성 면접을 온몸으로 대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짧고 단순하다.

나얼사?

처음엔 당황했다.

지금도 당황하긴 마찬가지다.

참고로 "나얼사"는 "나 얼마나 사랑해?"의 줄임말이다.

자주 말해야 하다보니 효율성을 추구했다.

줄여서 묻는다.


질문은 짧지만 답변의 감동은 깊어야 한다.

"하늘만큼 땅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1만큼 더"

"세상에서 제일"

이런 전형적인 답변들은 퇴짜 맞은 지 오래다.

한때는 먹혔으나 지금은 유통기한을 넘어, 소비기한까지 경과된 레퍼토리다.

진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타이밍이다.


답변이 면접관을 만족시키지 못해도 괜찮다.

아내는 만족할 답변을 들을 때까지 다시 기회를 준다.

집요하다고 해야 할지, 너그럽다고 해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내의 함박웃음을 끌어내는 재기 발랄 답변을 찾기 위해 나는 매번 머리를 쥐어짜낸다.

회사 면접에서는 면접 내용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했다.

하지만 아내의 창의성 면접은 그런 서약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 아내의 면접을 통과했던 모범 답변들을 카테고리별로 정리해 아낌없이 공개한다.


[자연을 활용하자]

돼지와 코끼리에게 코가 중요한 것만큼

견우와 직녀를 위해 오작교를 놓은 까치와 까마귀의 마음만큼

싱가포르에서 우연히 본 노란 꽃에 감탄했던 순간만큼

아기 오리가 엄마 뒤를 졸졸 따라가는 귀여움만큼

이순신 장군의 전술에서 울돌목이 중요했던 만큼


[실생활의 경험을 적용하자]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의 상쾌함 만큼

너 저번 주 지하철에서 화장실 급해 정차만 기다리던 간절함만큼

내일 회사 가기 싫은 만큼

네가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 한입 뺏어 먹고 싶은 만큼

어제 회의에서 딴지만 걸던 그 인간 꿀밤 한 대 주고 싶은 만큼


[너드미를 뿜어내보자]

파이의 소수점 자릿수만큼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법정에서 느꼈던 억울함만큼

떨어지는 사과를 본 뉴턴의 영감만큼

컴퓨터가 1초에 할 수 있는 연산량만큼

미지수가 셋인 2차 방적식을 푸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생각만 하고 입으로 꺼내지는 말자]

이 질문 그만 듣고 싶은 만큼...


이 외에도 부부 사이에서만 오가는 약간은 응큼한 답변, 다소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이 담긴 날것의 답변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금단의 구역에 숨겨두도록 하겠다.

우리 부부만의 비밀로 남겨두겠다.

이 글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로부터 부모의 위상을 지켜야 한다.

독자분들은 구두를 벗든, 넥타이를 풀든 상관없이 각자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주셔도 좋다.



오늘도 아내는 어김없이 면접을 실시했다.

"나얼사?"


이제 창의적인 한 문장을 짜내려면 단순히 경험이나 독서량, 어휘력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더 근본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의외로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원천은 거창한 이론서도, 낭만적인 시집도 아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딱 하나, 바로 단백질이다.

나는 지금 고기가 필요하다.



오늘 해 먹을 요리는 감자탕이다.

감자탕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감자와 시래기, 야들야들한 고기가 구수한 국물 안에서 착착 어우러진다.

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등뼈를 발라먹기가 너무 힘들다.


나는 기본적으로 손으로 먹어야 하는 음식에 대해 내면의 반항심이 있다.

예를 들면 귤.

사람들은 겨울만 되면 귤을 집어 들지만 나는 귤에 손대지 않는다.

귤을 까고 나면 손끝이 노랗게 물든다.

그 노란색을 보면 자존심이 상한다.

이 감정을 이해해 준 지인을 아직 한 명도 못 봤다.

그러니 그냥, "아 저기 좀 이상한 사람 하나 있구나"하고 넘어가 주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그렇다.


이런 나에게 감자탕의 등뼈 발라먹기 미션은 꽤 큰 진입장벽이다.

국물은 뜨겁지, 뼈는 미끄럽지, 손끝은 양념으로 뒤덮이지.

먹다 보면 고기와 씨름을 하는 건지, 식사를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수많은 창의성 면접으로 단련되어 왔다.

그러니 요리에도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꼭 등뼈여야 할까?

누가 감자탕은 등뼈로만 끓이라 했는가?


내면의 반항심에 경의를 표하며, 오늘의 감자탕에는 찜용 돼지갈비를 사용하기로 했다.

살덩어리도 더 크고 발라 먹기도 훨씬 편하다.




먼저, 고기를 물에 한 시간쯤 담가준다.

핏물과 불순물을 빼주는 시간이다.

국물을 만나러 가기 전 고기에게도 잠깐의 클렌징 타임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된장, 고추장, 다진 마늘 등을 물에 풀어 팔팔 끓이고 그 안에 고기를 넣어준다.

낯가림이 심해 뼈에 딱 붙어 있는 고기에게 국물과 친해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기가 부드럽게 마음을 열어준다.

30분 동안 푹 삶는다.

서로 마음을 열기엔 딱 좋은 시간이다.


그다음은 취향에 따라 조절 가능한 재료들이 투입된다.

묵은지, 시래기, 파, 청양고추.

30분 정도 더 지나면 냄비 안에 감자탕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감자, 깻잎, 팽이버섯, 들깨가루를 넣고 15분 더 끓여준다.

들깨가루의 고소함으로 마침표를 찍어주어야 구수한 감자탕의 맛이 난다.

이렇게 하면 손끝 하나 더럽히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돼지갈비 감자탕이 완성된다.



별다른 반찬 없이 깻잎장아찌 하나만 꺼냈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묵은지는 산미로 입맛을 돋우고, 도톰한 고기 살점은 부드럽게 씹혔다.

시래기는 촉촉했고, 깻잎은 풍미를 더했다.

감자는 국물을 머금고 포슬하게 풀렸다.

구수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내는 분주히 외출 채비를 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잠시 집을 비운다고 했다.

그럼 이제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잠시 여유를 즐긴다.

소파에 몸을 던지고 스피커로 음악을 튼 뒤 책을 읽는다.

졸리다.

잠시 일어나 창문 밖 놀이터에서 깔깔대며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어본다.

세상 평화로웠다.


그런데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나 일 다 처리했고, 이제 집 가는 중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나얼보?


잠깐!

이건 또 뭔가?

왜 새로운 문제가 출제된 것인가?

게다가 이젠 전화 면접까지 도입된 모양이다.

"나얼보는... 또 뭐야?"


아내는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나 얼마나 보고 싶냐고~"


그렇다.

아내의 창의성 면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답안을 준비해 발표한다.

"오늘 네가 감자탕 맛있게 먹은 만큼."


그 말에 아내는 명랑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 정도면 엄청 보고 싶은 거잖아~ 얼른 갈게~~"


후... 이렇게 나는 또 한 번, 창의성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다.


아내의 후기

돼지갈비 감자탕
★4.8점
오랜만에 먹은 짭조름하고 자극적인 신랑표 감자탕!
감자탕은 고런 맛으로 밥에 비벼먹어야 제맛이죠!
돼지고기도 부드러워 뼈와 잘 분리되어 먹기도 편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두 그릇 먹었네요.
아이참ㅎㅎ


P.S.

등뼈 대신 돼지갈비를 쓰는 감자탕 레시피를 내가 처음 만든 건 아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등갈비며 앞다리살까지 다양한 부위로 감자탕을 끓여본 기록들이 쏟아진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나는 기존의 좋은 아이디어를 잘 가져다 쓴 것에 가깝다.


하지만 괜찮다.

창의력이란 꼭 세상에 없던 걸 뚝딱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니니까.
누가 봐도 훌륭한 걸 발견했을 땐 그걸 따라 해보는 것도, 내 상황에 맞게 살짝 바꿔보는 것도 충분히 창의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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