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육, 두부참치전, 해물야채볶음
대학 가면 예쁜 여자친구 생기니까,
지금은 공부 열심히 해.
예전 어른들의 수상한 조언이다.
예쁜 여자친구가 대학 입학하면 주는 선물도 아니고, 너무 진부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겪은 실화에 기반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학 가면 예쁜 여자친구 생기니까,
지금은 코딩 열심히 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연히 '프로그래밍'이라는 걸 접하게 됐다.
코드를 치면 뭔가 계산되고, 화면이 반응하고.
컴퓨터가 내 명령대로 움직인다는 그 느낌이 꽤 짜릿했다.
물론, 코딩 공부한다는 핑계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몰래 게임도 꽤 했다.
거의 프로게이머 지망생 수준으로~
아! 그만 그만!!
지금은 예쁜 여자친구 만드는 이야기니까, 그런 기억들은 임시기억장치 RAM에 살짝 올려뒀다가 휘발시킨다.
'코딩 열심히 했던 소년'만 깔끔하게 데이터베이스에 영구 저장하겠다.
중학교 땐 도대표도 하고, 컴퓨터 꿈나무로 부총리 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니까 코딩 공부에 나름 진심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개발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이상한 심리가 뇌를 치고 들어왔다.
"어차피 난 개발자 될 건데, 지금 아니면 다른 공부는 못 해보잖아."
그리하여 나는 경영대로 진학하는 선택을 한다.
최적화 알고리즘 관점으로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선택일 수 있겠다.
경영대 안에서도 나는 프로그래밍 소학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놀랍게도 예쁜 여자친구를 만났다.
당연히 지금은 그 예쁜 여자가 내 여자친구는 아니다.
꽤 오래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 그녀는 메뉴판 없는 식당의 유일한 단골인 내 아내이다.
그런데 전 여친이자 현 아내인 유일한 단골이 오늘의 손님은 아니다.
메뉴판 없는 식당에도 가끔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대학 시절 나는 소학회에서 연애도 했지만, 후배 관리에도 꽤 진심이었다.
오늘의 손님은 같은 소학회에서 활동했던 후배 둘.
이 녀석들은 원래 프로그래밍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던 경영대생이었다.
그런데 나를 만나버리고 말았다.
나의 영향을 많이 받아, IT 쪽으로 복수 전공을 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과제를 받으면 이런 말도 했다.
“형 때문에 복전 결심했으니까, 이 과제 어떻게 하는 건지 빨리 알려주세요.”
정서적 협박이 동반된 진로 상담을 하던 녀석들이 지금은 둘 다 제대로 자리 잡았다.
한 명은 국내 통신사 대기업에서 신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다른 한 명은 이 글이 올라갈 플랫폼, 브런치의 개발자이다.
정리하자면 나는 후배를 키워 브런치 개발자를 만들었고, 지금 나는 그 브런치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오늘 브런치 개발자님께서 직접 작가를 방문해주신다고 한다.
그러니 이젠 칼과 도마를 들어야 할 타이밍이다.
첫 번째 메뉴는 수육이다.
요리는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수육용 삼겹살을 된장 베이스로 미리 염지해 둔다.
겉절이도 함께 준비한다.
고춧가루, 새우젓, 마늘로 양념해 수육을 기다리는 채소의 자세를 갖춰놓는다.
된장, 고추장 등을 넣고 섞어 쌈장도 만들어준다.
약 12시간 동안 염지한 삼겹살은 양파, 마늘, 파, 통후추 등과 함께 삶는다.
따로 물은 넣지 않고 1시간 정도 삶아 무수분 수육으로 만들어준다.
먹고 좋게 썰어주면 야들야들한 수육이 완성된다.
그리고, 봄비가 내리길래 전도 부쳐본다.
자고로 집에 손님이 오면 기름 냄새를 풍겨줘야 예의라는 집안 어르신들의 말씀이 있었다.
두부, 참치, 고추, 쪽파, 계란 등을 섞는다.
농도는 전분으로 잡아준다.
약불에 노릇노릇 속까지 잘 익혀내면, 간단히 두부참치전이 완성된다.
마지막 메뉴는 수육과 전의 느끼함을 잡기 위한 매콤한 해물야채볶음.
각종 야채와 해물을 한데 넣고, 청양고추로 칼칼함의 정도를 잡아준다.
양념은 굴소스 딱 한 숟갈인데, 이상하게 맛은 중식집 A코스 중 5번째 요리 같다.
잘 차려진 식탁을 본 후배 녀석들이 묻는다.
“형이 원래 이렇게 요리 잘했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린 거의 밖에서만 만났다.
녀석들이 내가 손에 쥔 걸 본 기억이라곤 키보드, 마우스, 술잔,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아내의 손 정도일 거다.
내가 칼을 잡는 모습은 오늘 처음 봤을 것이다.
어쨌든 맛있는 요리에 술 한잔 곁들이며 그동안 못 나눈 안부를 주섬주섬 꺼내본다.
하지만 곧 개발자 후배들 답게 기술 얘기를 시작한다.
서버는 어쩌고, 프론트엔드는 저쩌고, 요즘 AI가 얼마나 똑똑해졌는지 떠들기 시작하는데...
굳이 사람끼리 모여서, 사람이 아닌 컴퓨터 얘기만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독자 이탈 방지를 위해, 이 대화는 글에서 휘발시키기로 한다.
그러다 후배는 개발자로서, 브런치를 더 좋은 서비스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털어놨다.
나는 브런치 작가로서, 이 플랫폼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했다.
그렇게, 브런치를 '만드는 이야기'에 브런치를 '쓰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이 생산적인 대화의 끝은 대한민국 남자들의 불변의, 그리고 아주 비생산적인 테마로 수렴된다.
군대 이야기.
"형, 전 철원에서 혹한기 훈련 했어요."
"너 운전병이었잖아."
"근데 유격 두 번 했거든요?"
서로 내가 더 힘들었느니, 누가 축구를 더 잘했느니 하며 분위기가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다.
시간이 흘러 요리도 다 먹었고, 이야기도 다 털어냈고, 술도 딱 좋을 만큼 돌았다.
자연스럽게 슬슬 정리하는 분위기.
역시 오래된 사이란 건, 굳이 마무리를 꾸미지 않아도 되는 사이다.
후배들을 보내고 나서, 설거지를 끝낸 뒤 아내와 통화를 한다.
"잘 놀았어?"
"응. 요리도 잘 되고, 다들 맛있게 먹었어. 재밌었어."
그러자 내가 코딩 공부로 얻은 그녀는, 전지적 아내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뭐 또 알아들을 수도 없는 개발 얘기하다가,
군대 얘기나 했겠지
... 정답.
후배들의 후기
브런치 개발자 후배
너무 배불리 잘 먹었습니다 ㅎㅎ
또 다른 후배
형님 잘 먹고 잘 놀고 가요ㅎㅎ
P.S.
애초에 정성스러운 후기? 기대 안 했다.
짧고 명료한 게 아주 개발자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