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유린기, 양념치킨소스
아내에게는 주기적으로 공급해줘야 하는 몇 가지 음식이 있다.
공급 주기를 놓친다면 아내의 기력이 바닥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공급보다는 투여에 가깝다.
그중 하나는 치킨이다.
단! 아무 치킨이나 통하지는 않는다.
BBQ 황금올리브? 교촌 오리지널? 어느 정도 응급 상황은 막을 수 있겠다.
아내가 진정 원하는 건 메뉴판 없는 식당에서 내가 직접 튀겨낸 수제 치킨이다.
가끔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튀긴 치킨 좀 먹어야 하는데...
이건 긴급 수급 요청이다.
이 말이 나오면 이미 아내의 치킨 게이지는 위험 수위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난주, 두 번의 경보가 울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오늘은 닭을 튀긴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이건 그냥 요리가 아니다.
치킨 한 마리에 3만 원 육박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에서 튀긴 치킨은 일종의 자산 가치도 있을지 모른다.
반은 후라이드, 반은 유린기로 현명하게 분산 투자한다.
우선 닭다리살에 염지를 하고, 전분가루에 버무려 잠시 그냥 둔다.
그리고 적당한 온도의 기름에서 튀겨낸다.
적당한 온도가 몇 도인지는 모른다.
집에 온도계 따위는 없다.
요리는 감이다.
한 번 튀긴 닭은 잠시 세상 구경을 시킨 뒤, 다시 기름 속으로 들어간다.
두 번 튀기면 더 바삭하다고 한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있어 보이니 나도 그렇게 한다.
접시에 양상추를 깔고, 먹기 좋게 자른 닭을 그 위에 올린다.
간장 베이스에 청고추, 홍고추, 대파를 썰어 넣은 소스를 뿌리면 유린기 완성.
남은 닭은 있는 그대로, 후라이드 본연의 모습으로 낸다.
곁들이는 소스는 후추를 뿌린 소금.
고추장, 케첩, 물엿 등을 섞어 볶은 양념치킨 소스.
드디어 아내가 치킨을 입속에 공급한다.
그 순간,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건 극도의 만족에서 나오는 찡그림이다.
이때부턴 절대 말을 걸면 안 된다.
아내는 약 3분 간 몰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온전히 치킨과의 시간이다.
나는 조용히, 요리 시작 전에 냉동실로 옮겨둔 맥주를 꺼낸다.
맥주를 참을 수 없는 맛이다.
아내는 맥주를 싫어한다. 참 다행이다.
아내가 맥주까지 좋아했으면 치킨 공급 주기가 절반으로 줄었을지도 모른다.
3분이 지났다. 아내의 미간이 풀렸고, 이제 대화가 가능하다.
요리는 묘하다.
먹는 순간, 그때의 장면이 되살아난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먹었는지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놓는다.
우리는 유린기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한다.
유린기는 내가 손님을 대접할 때 자주 꺼내 드는 메뉴다.
접대용 요리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
대충 준비한 요리는 손님이 먼저 안다.
둘, 비주얼.
사진은 물론이고 손님의 인스타까지 올라간다면 대성공이다.
그리고 셋,
칭찬받을 맛.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질 정도로 맛있어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세 번째다.
아무리 정성이고, 비주얼이고, 뭐고 해도 맛이 없으면 그건 그냥 열심히만 한 것일 뿐.
유린기는 기본적으로 튀김 요리다.
그리고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
지우개를 튀겨도 맛있고, 신발을 튀겨도 먹을 만하다.
튀김은 치트키다.
작년 가을, 아내의 대학 시절 친구 두 명이 우리 집을 찾았다.
아내는 대학 시절, 걸스힙합 파트를 이끌던 리더로 학교 댄스 동아리의 한 축이었다.
리더란 이름이 주는 부담, 팀원 간 갈등, 공연 전날 밤샘 연습까지...
그 시절을 버텨낸 아내에게 위로가 되어준 친구들.
이들의 추억을 듣고 있자면, 마치 걸그룹 연습생 시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듣는 기분이다.
극진히 대접해야 했다.
요리는 당연히 내 담당이었다.
나는 세 가지 요리를 준비했다.
그중 하나가 유린기였다.
손님들의 도착 시간에 맞춰 요리를 준비했다.
닭을 다 튀기고, 한 조각 잘라 아내에게 건넸다.
맛 좀 봐달라고.
아내가 한 입 먹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장 더 잘라 달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손님도 오기 전에 준비한 800g 중 약 150g이 사라졌다.
혹시 친구들이 갑자기 방문을 취소하더라도 아내는 친구들을 염치없다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치킨이 전부 자기 차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행복했을 것.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닭을 잘 튀긴다.
그리고 그날 이후, 유린기를 준비하면 반드시 튀긴 그 상태 그대로 일부는 덜어놓는다.
다행히 아내의 친구들은 염치 있게도 도착했다.
친구들이 도착하고 요리를 하나씩 차려내던 그때, 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도 못했던 사실.
아내의 친구 중 한 명은 중국인이었다.
유린기는 중국요리 아닌가.
그런데 몇 번 만들다 보니, 그게 중국 요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오빠가 식당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셰프 가족을 둔 중국인에게, 요리를 취미로만 해온 한국인이 중국 요리를 대접한 셈이다.
마치 가수 오디션 참가자가 노래를 끝내고 심사위원 앞에 서 있는 느낌.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아내의 친구가 나의 유린기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말했다.
제 고향 광동의 맛이 나요.
이건 칭찬이다. 극찬이다.
아내의 친구는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산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부디 시간이 흐르며 고향의 맛을 잊은 건 아니길 바란다.
나는 감격에 찬 눈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요? 너무 고마워요. 근데... 광동이 어디예요?"
아내의 친구가 대답했다.
중국 남쪽이요.
그때부터 나의 유린기는 더 이상 평범한 유린기가 아니다.
그 이름도 거창한 ‘중국 남부 광동식 유린기’로 거듭났다.
정정하겠다.
내가 오늘 아내에게 내놓은 음식은 치킨과 ‘중국 남부 광동식 유린기’ 되시겠다.
아내의 후기
치킨
★4.8
치킨 가루가 아닌 전분을 입혀 튀겨 사 먹는 치킨과 달리 껍질이 쫀득합니다!
이렇게 쫀득한 치킨은 못 먹어본 것 같아요 겉쫀속촉!
갓 튀긴 후라이드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서 먹으면서 미간 찌푸려지고 행복했습니다
유린기
★4.5
살짝 칼칼한 소스가 느끼한 치킨맛을 보완해 주었습니다.
소스에 푹 찍어먹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맛이었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P.S.
원래는 치킨과 유린기를 각각 따로 한 장씩 멋지게 찍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 밝혔듯, 우리는 '음식은 일단 바로 먹고 본다’ 주의.
완식 인증샷 전문 부부다.
오늘도 어김없이, 한참 먹다 말고 전체 샷 한 장만 남겼다는 걸 눈치챘다.
각별히 주의하여 사진을 남기겠다는 결심은, 이렇게 바로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