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꼬동, 일식장국
3주 전 새벽 4시, 평소보다 이른 시간 일어난 아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속이 안 좋아... 매스껍고 이상해.
어둠 속에서도 안색이 건강함의 반대편에 있었다.
장난일 리 없었다.
F형 남편이라면 아내가 얼마나 아픈지, 지금 괜찮은지부터 걱정했을까?
T형 남편인 나는 제일 먼저 전날 먹은 음식부터 확인한다.
어제 먹은 건 김밥 몇 줄과 찐 옥수수뿐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김밥이 더 수상하다.
제발 큰 탈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다행인 건, 그날은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다.
하지만 마음 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딱 네 시간 뒤, 아침 8시 우리가 예약한 비행기는 일본 나고야로 출발한다.
출근이면 반차라도 낼 수 있겠지만 비행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시에 곧장 이륙이다.
그래도 아내는 여행은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버틸만하다고 했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병원부터 가자고 해야 할지 0.3초 정도 고민했다.
0.3초면 컴퓨터는 대략 9억 번 사이클을 돌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T형 남편의 판단은 단순했다.
아내의 회복력을 믿고, 출발하기로 한다.
전날 '나고야룩'이라며 아내가 신중히 고른 예쁜 옷들은 그대로 짐가방에 쓱 구겨 넣었다.
대신 후줄근하지만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장모님이 사주신 츄리닝 차림이다.
오히려 이런 차림으로 공항에 가니 진짜 해외여행 고수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조금이라도 더 아프거나 이상하면
바로 얘기해 줘.
당부를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야 공항버스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다행히 20분도 채 안 되어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다.
전날 스마트패스에 온라인 체크인까지 완벽하게 해 둔 덕분이다.
아내는 의자에 누워 조용히 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의 이 완벽한 준비력에 생색을 한가득 냈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제했다.
잠시 후, 아내는 웃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회복 기미를 보였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상황... 익숙한 그림이기도 하다.
여행 중에 아내가 아팠던 건 자주 있던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여행 일주일 전부터 비타민까지 챙겨 먹으며 각오를 다졌던 아내다.
하지만 결과는...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탈이 났다.
역대 최단 기록이다.
뭐, 이런 게 우리의 여행이다.
계획은 매번 깨지지만, 그래도 우린 아주 잘~ 논다.
아침 비행기를 고른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나고야에서 먹고 놀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체크인 시간이 한참 남은 오전 11시 30분에 숙소에 도착해 버렸다.
조심스레 얼리 체크인이 가능한지 물었고, 추가 요금을 내면 된단다.
거의 하루 숙박비의 절반을 더 내고 방에 들어갔다.
아내는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물론 아내였다.
하지만 새벽부터 아픈 사람 챙기며 여기까지 온 나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잠든 아내를 보니 긴장이 풀렸다.
허기가 밀려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둘이 맛집에서 신나게 점심을 먹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디저트까지 먹기 위해 초콜릿 전문점도 세심하게 골라두었었다.
초콜릿을 맛있게 먹기 위해 '사이드 메뉴를 하나 더 시킬까 말까' 같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계획은 세우는 것일 뿐, 지켜지는 건 아니다.
그렇게 나의 여행 첫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이 되었다.
2년 전 도쿄 여행에서도 아내는 아팠었고, 그때도 결국 나는 똑같은 도시락을 먹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참 맛있었다.
이쯤 되면 이 도시락은 나에게 응급 상황용 미슐랭이다.
축 늘어져 잠든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맥주 한 캔을 땄다.
시원한 한 모금에 '그래도 도착은 했잖아' 하는 안도감이 스친다.
식사를 마친 후 나도 아내 옆에서 살짝 녹아내렸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 다시 생각해 본다.
아무리 도시락이 맛있었어도 미리 찾아둔 그 맛집에 못 간 건 너무 아쉬웠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 먹을 음식은 일본식 닭고기 덮밥, 오야꼬동이다.
'오야'는 부모, '꼬'는 자식, '동'은 덮밥을 뜻한다.
닭이 부모, 달걀이 자식.
이 둘을 간장 양념에 익혀 밥 위에 얹는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이 한 그릇에 담긴 셈이다.
이미 우리말로 다 풀어놓고 하는 말이지만, 굳이 내가 이걸 왜 해석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닭부터 손질한다.
배고픔은 항상 감성을 이긴다.
닭다리살을 깨끗이 씻은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그다음 양파를 얇게 썰어준다.
눈가가 촉촉해진 김에 아내를 바라보며 한마디 날려준다.
"나고야 여행 갈 때 많이 힘들었지"
아내가 말한다.
"어 양파 써는 거 다 보여~"
흠... 이제 간장 베이스 양념과 함께 닭과 양파를 중불에 올린다.
5분 정도 익히면 집 안에 슬슬 맛있는 냄새가 돌기 시작한다.
여기에 채소가 하나 더 들어가면 완성도가 급상승한다.
쪽파나 대파도 괜찮지만, 참나물이 제격이다.
줄기를 썰어 넣고 풀어놓은 계란을 한 번 부어 30초간 익힌다.
그리고 다시 간장을 살짝 넣고 푼 두 번째 계란을 투입하고 15초만 익힌다.
그다음 따끈한 밥 위에 이 모든 걸 조심스럽게 올린다.
마지막으로 참나물 잎을 툭 얹는다.
이 참나물이 오야꼬동의 맛을 끌어올리는 결정타다.
진짜 일식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국물까지 준비한다.
미역, 두부, 쪽파를 넣고 끓인 일식풍 장국.
이로써 아내가 보내는 칭찬의 박수를 이끌어낼 준비가 완료되었다.
오야꼬동을 전에 먹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비교고 뭐고 일단 너무 맛있다.
닭은 부드럽게 씹히고 계란은 몽글몽글 입안에 퍼진다.
양파는 감칠맛을 더하고, 참나물의 향긋함이 모든 것을 마무리한다.
국물 한 숟갈 곁들이면 진짜 나고야 골목 작은 밥집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식사를 하며 아내와 나는 나고야 여행을 회상했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의 여행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이번에는 더욱 그러했다.
방문한 식당마다 묘하게 우릴 시험하듯 계획을 거부했다.
한 식당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인기 맛집이었다.
우리는 차례가 오기까지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옆 서점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건졌다.
일본 특유의 감성 폭발 엽서, 편지지, 스티커, 노트까지.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몇 가지를 품에 안았다.
브레이크 타임이 없는 줄 알고 당당하게 방문한 또 다른 식당 역시 우리를 거절했다.
발길 닿는 대로 들어선 상점에서,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인생 장면이 담긴 필통을 발견했다.
아내의 눈빛은 운명의 물건을 만난 사람 같았고, 그 필통은 지금 아내의 책상 위에 있다.
관광지도 계획과는 전혀 다른 곳을 방문했다.
우리는 정해둔 일정을 통째로 바꿔 나고야 동물원에 갔다.
참고한 여행 책자에도 없었고, 한국 관광객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목표는 코알라였다.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친구다,
그런데 한국엔 없다는 사실에 알고 나니 꼭 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코알라!
가지 위에 엉덩이를 꾹 눌러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65장 찍었다.
엉덩이만.
그리고 내 마음을 뺏어간 말레이맥
덩치는 큰데 얼굴은 순하고, 앞은 시커멓고 뒤는 하얀, 앞뒤가 완전히 다른 동물.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볼수록 이상하게 매력 있다.
낮잠 자는 하마가 아내에게 가장 큰 웃음을 선사했다.
소파에서 졸고 있는 나를 꼭 닮았다며, 아내는 한참을 웃어댔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훔쳐간 동물들의 엽서까지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갑자기 원래 일정에 없던 도자기 박물관에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는 법, 유약을 바르는 기술, 그리고 아름다운 찻잔들과 그릇들을 실컷 구경했다.
우리는 마치 '이 그릇이 나를 부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열장 앞에서 거의 숨을 멈추고 구경했다.
꽤 오랜 시간 감탄만 하다 빠져나왔다.
이번 여행에서 지켜진 계획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 당장 다시 나고야에 간다 해도 여행 계획은 새로 짤 필요가 없다.
정성껏 짠 계획표를 조금도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너무 즐거웠다.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여행은 완벽하게 기억에 남았다.
식사를 마친 뒤, 아내와 나는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 있었고, 나는 눈여겨본 에세이가 있었다.
그런데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건 썩 반갑지 않은 한 줄이었다.
휴관일입니다.
여행뿐만이 아니다.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내의 후기
오야꼬동
★4.5
부드러운 닭고기와 소스가 밥과 잘 어우러져 밥이 술술 들어갔습니다!
밥 양이 꽤 많았는데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 순식간에 완식 했네요ㅎㅎㅎ
너무 잘 먹었고 한술 한술 행복을 먹은 것 같아 감사합니다!
일식장국
★4.0
일식집 장국과 비슷하게 재현해 내 대단했습니다~
비주얼을 장국이 놓인 순간 식탁에서 일식집 분위기가 확 나더라고요!
잘 먹었습니다
P.S.
자세히 적진 않았지만 아내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했다.
진짜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도 다행히 숙소에서 4시간 정도 푹 자고 나더니, 기적처럼 회복했다.
심지어 내가 "3시 반이야"라고 했더니, 새벽 3시 반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 말인즉, 무려 12시간을 더 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꿀잠을 잤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회복의 결과?
아내는 저녁으로 히츠마부시(장어덮밥)를 무려 특대 사이즈로 먹었다.
일주일 전부터 열심히 챙겨 먹은 비타민의 효과였을까?
어쨌든 회복력만큼은 진짜,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의 여행도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