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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에 취하다

참치마요쌈, 훈제오리쌈, 애호박치즈구이, 버섯구이

by 퉁퉁코딩

나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터틀넥 티를 입거나 목도리를 두르지 않는다.

입을지 말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쳐다볼 일도 없다.

목을 감싸는 옷이라면 그게 아무리 따뜻하고 예뻐도 나에게는 일종의 족쇄일 뿐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목에 뭔가 닿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태아 시절 엄마 뱃속에서 발차기를 유독 열심히 했는데, 아마 탯줄이 목에 닿는 게 꽤나 거슬렸나 보다.


이런 나에게 초등학생 시절 하나의 작은 불안이 있었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것' 때문이었다.

교복에는 깃이 달린 셔츠가 기본인데, 그 깃은 어김없이 목을 건드린다.

당연히 굉장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며 그 불안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요즘은 아침 등굣길에 편안한 생활복 차림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약 20년 전에는, 국민의 의무 중 하나인 교육의 의무가 사실상 교복의 의무에 가까웠다.

학생은 당연히 교복을 착용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처럼 한 소식을 듣게 된다.

'교복을 입지 않는 고등학교가 있다.'

그 순간, 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희열을 느꼈다.

목의 자유를 위한 일생일대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다만, 그 학교는 과학고등학교였다.

다시 말해 특목고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중학교 성적이 꽤나... 아니, 아주 좋아야 했다.

그러자 내 안의 학습 동기 부스터가 생애 처음으로 작동했다.

나는 목의 자유를 꿈꾸며 간절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교복을 입지 않기 위해서'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교복을 입지 않는 중학교는 결국 찾지 못했다.

중학교는 어쩔 수 없이 교복을 입는 평범한 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식도 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직접 하신 전화였다.

어머니는 내가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고 가슴을 졸였지만, 그 전화는 평생 어머니의 자랑이 되었다.

입학 전 치른 반배치 고사에서 수석을 했다는 것이었다.

교장실에 초대된 어머니는 축하 인사와 함께 교복 교환권을 받아오셨다.

나는 교복을 피하고자 공부했건만, 그 보상으로 교복을 받는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어쨌든 나는 중학교 입학식에서 전교생 대표로 선서를 했고,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교복 없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목의 자유를 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성공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런 나에게 개발자라는 직업은 천직 중의 천직이다.

단연, 복장에서 자유롭다.

개발자들은 정장 같은 걸 입지 않는다.

동료 개발자들이 정장을 입은 모습은 그들의 결혼식에서나 볼 수 있다.

사무실로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부터 나는 단 한 번도 깃 달린 옷을 입고 출근한 적이 없다.

여름에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출근한다.

편안한 옷차림, 자유로운 영혼.

이토록 내 체질에 딱 맞는 직업이 또 있을까 싶다.


셔츠는 오직 두 가지 상황에서만 입는다.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

몇 년 전, 경사였는지 조사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셔츠를 입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흰 셔츠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옷걸이와 옷장을 완전 탐색했지만 목표 값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 뒤, 아주 낯선 '핑크빛'옷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베트에 복숭아즙 두 방울 떨어뜨린 색감이었다.

그런데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손끝으로 옷깃을 살짝 만지는 순간 나는 알아챘다.

이건 내 흰 셔츠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내가 자신의 빨간 옷과 내 셔츠를 같이 세탁기에 넣었다.

그 결과, 내 셔츠는 물들었다.

아내의 사랑과 실수가 함께 세탁기에서 회전한 결과물이었다.


놀라운 건 그 염색 퀄리티였다.

실수라기엔 너무나 완벽했다.

색이 기막히게 고르고, 농도는 절묘하며, 번짐 하나 없이 완벽했다.

심지어 나는 살짝 감동했다.

"이거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아내는 미안해하며 눈치를 봤지만, 나는 그 셔츠를 들고 기뻐하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 어떤 브랜드도 구현하지 못할,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핑크 셔츠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랬던 아내가 이번에 또 다른 핑크의 무언가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며칠 전, 우리는 전주에 두 번째 여행을 다녀왔다.

전주는 맛의 도시라더니, 갈 때마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심지어 배달 치킨조차 남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첫 여행에서 단 하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 있다.

바로 전주를 대표하는 전통 술 '모주'였다.

우리가 처음 모주를 마셔본 건 순댓국집에서였다.

문제는 순댓국과 달콤한 계피향의 모주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밥 한입 먹고 사탕을 빠는 기분이랄까?

혀가 혼란에 빠졌고, 마음도 그 뒤를 따라 당황했다.


아내는 그날의 아쉬움을 꽤 오래 곱씹었나 보다.

그리고는 두 번째 여행에서 선언했다.

이번엔 직접 만들 거야.


아예 '모주 만들기 체험'을 예약해 버렸다.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코스였다.

아내는 체험 전날 밤까지 후기를 정독한 뒤 세 가지 버전 중 '핑크 모주'를 골랐다.

이번엔 셔츠가 아니라, 핑크빛 술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핑크 모주는 일반 모주보다 새콤하고 달콤하며, 살짝 분홍빛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비주얼부터 감성과 전통의 미묘한 퓨전이 느껴진다.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쉽게 말하면 막걸리에 고급 차를 우리는 느낌이다.

막걸리를 한소끔 끓인 뒤 계피, 대추, 말린 과일 등을 넣고 티백을 천천히 우려내듯 조심스럽게 끓여낸다.

그렇게 우리는 직접 핑크 모주를 만들었고, 귀하게 병에 담아 집까지 모셔왔다.



하지만 아내는 술을 만들었지, 안주까지 책임진다고는 안 했다.

안주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지난번 순댓국과의 그 아쉬운 조합을 또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번엔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잠깐 모주믈리에가 되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고심한 결과, 오늘 그 핑크 모주에 딱 어울릴 만한 안주를 직접 만든다.


오늘 만들 요리, 아니 안주는 총 네 가지다.

참치마요쌈, 훈제오리쌈, 애호박치즈구이, 버섯구이.


애호박치즈구이는 이 중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라 먼저 준비에 들어갔다.

애호박을 반으로 갈라 부드러운 속을 파낸다.
파낸 속은 미트소스와 함께 약불에 볶아 풍미를 끌어올리고 그걸 다시 애호박 안에 채워 넣는다.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얹어 예열한 오븐에서 30분간 천천히 익혀준다.
치즈가 노릇하게 녹아내리면, 속은 촉촉하고 겉은 고소한 애호박치즈구이가 완성된다.


오븐에서 애호박이 익는 동안 참치마요쌈을 만든다.

갓 지은 따끈한 밥에 소금,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고루 밑간을 한다.
기름을 뺀 참치와 마요네즈를 버무려 주먹밥 모양으로 빚는다.

깻잎을 깔때기 모양으로 예쁘게 말아 속을 채우면, 한입에 쏙 들어가는 참치마요쌈이 금세 모습을 갖춘다.


이어지는 메뉴는 훈제오리쌈이다.

같은 방식으로 만든 깻잎쌈 안에 치즈와 훈제오리를 넣는다.
그 위에 머스터드 소스를 살짝 뿌려준다.
간단히 단짠단짠의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하는 훈제오리쌈도 차려진다.


마지막은 버섯을 구워본다.
오늘 사용한 버섯은 설원버섯이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뒤, 기름을 두른 달군 팬에서 굽기 시작하면 고소한 향이 먼저 입맛을 자극한다.

마늘가루, 소금, 후추를 섞어 만든 시즈닝을 솔솔 뿌리고 약불에서 노릇하게 구워준다.
은은한 풍미가 살아 있는 버섯구이가 입맛을 유혹할 준비를 마친다.



평소 아내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술 생각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 "한잔 해야겠다"인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모주는 도수가 1%도 안 되는 아주 약한 술이다.

거기에 일반 모주보다 더 달콤하고 상큼한 핑크 모주니 아내도 부담 없이 잔을 들었다.

핑크빛이 은은하게 스며든 잔을 살짝 부딪쳤다.

잔 소리도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마시는 순간, 향긋한 계피와 살짝의 과일 향이 입 안을 감쌌다.

그렇게 우리는 핑크빛 술과 한 입 안주를 주고받았다.

첫 모주의 아쉬움을 지워냈고 오늘 하루를 아주 사소하지만 완벽하게 기념했다.



준비한 음식을 다 먹은 뒤 상을 정리하고 소화를 시킬 겸 산책을 나섰다.

저녁 공기는 시원하고 맑았고, 요즘 같은 날씨엔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중 귀여운 광경을 마주쳤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자전거가 꽃내음에 취했나 봐."


철쭉이 만개한 길가에, 철쭉과 꼭 닮은 핑크빛 옷을 입은 자전거 한 대가 옆으로 살짝 누워 있었다.

마치 꽃 사이에 눕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내는 이건 찍어야 한다며 카메라를 켰고, 한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 너머의 그 눈빛엔, 오늘 하루의 모든 행복이 담겨 있었다.


찬 바람을 쐬면 술이 깰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더 취하는 기분이었다.

핑크빛 술에 취한 걸까?

그럴리 없다.

애초에 그 술은 도수가 낮아 취하는 게 더 어려운 술이었다.


그럼 핑크빛 꽃내음에 취한 걸까?

아니면 핑크빛 사랑에 취한 걸까?

철쭉 옆에 누운 자전거처럼, 아내 옆에서 곤히 잠들고 싶은 밤이다.


아내의 후기

핑크 모주
★3.0점
색감이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게다가 신랑과 제가 함께 만든 술이라 그런지, 한 잔 한 잔에 추억이 담긴 느낌이었죠.
알코올도 거의 없고 달콤해서 식전 디저트주로 딱이었어요!

참치마요쌈
★4.0점
건강하고 깔끔한 맛의 참치마요 주먹밥!
깻잎에 싸여 향긋함이 더해지고, 간도 세지 않아 계속 손이 갔어요.
딱 "한 입만" 하면서 끝도 없이 먹게 되는 중독성 있는 메뉴였어요 ^^

훈제오리쌈
★4.2점
훈제오리는 늘 진리죠.
고소하고 쫄깃한 오리살에 치즈와 머스터드가 더해지니, 누구나 좋아할 맛이었어요.
안주로도 찰떡입니다.
손이 바빠지는 메뉴!

버섯구이
★4.0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설원버섯으로 만든 요리였어요.
노릇노릇 잘 구워져서 풍미도 살아 있고, 간도 딱 좋아서 반찬으로도 최고입니다.
버섯은 언제나 은은하게 존재감이 확실하죠.

애호박치즈구이
★4.3점
와~ 애호박이 진짜 부드럽게 잘 익었어요!
속을 채운 미트소스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져서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느낌.
애호박이 이렇게 근사할 수 있다니!


P.S.

애초에 모주라는 술 자체를 이번이 두 번째로 마셔보는 데다, 그것도 생소한 핑크 모주였다.
어떤 안주를 준비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검색을 해봐도 딱히 정답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동원한 수단은 바로 AI였다.

핑크 모주가 어떤 술인지 설명해 주고 어울릴 만한 안주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무려 30가지 가까운 안주 리스트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몇 가지를 골라 레시피를 함께 손보며 구상한 것이 바로 오늘의 안주들이다.

AI! 좋은 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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